[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배우 김혜수는 국내에서 가장 멋있는 배우로 통한다. 영화 '타짜'에서 화투를 칠 때도, '도둑들'에서 다이아몬드를 훔칠 때도, '차이나타운'에서 살이 찌고 검버섯이 핀 얼굴에도 김혜수는 늘 멋있었다. 뿐만 아니라 레드카펫 위에서 섹시한 드레스를 입고 환한 미소를 지을 때나 영화 시상식에서 진행을 할 때, 심지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발언을 할 때도 그는 당당했고 멋있었다. 김혜수가 매 순간 멋있게 느껴질 수 있는 건 언제나 진심을 다한 최선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노력을 바탕으로 한 당당함에 매료된 후배 배우들은 김혜수를 롤모델로 꼽곤 한다.
멋이라는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김혜수가 신작 '굿바이 싱글'에서는 '바보'의 길을 택했다. 20년차 경력을 지닌 여배우이지만 지식과 지혜, 실력은 부족하며 때론 이기적으로도 비춰지는 고주연을 연기한다. 그 어느 때보다 파격적인 선택으로 관객과 만날 준비를 하고 있는 김혜수를 최근 삼청동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그 곳에서 매사 당당하고 멋있을 수 있는 김혜수의 비결을 들어봤다.
배우 김혜수. 사진/쇼박스
"전형적인 작품이라도 진심을 담고 싶었다"
영화 '굿바이 싱글'은 국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코미디 영화다. 초반부 독특한 캐릭터와 이색적인 상황으로 유머감 넘치게 출발해 중반부 갈등을 고조시키며, 후반부 감동을 터뜨리는 구조다.
자기밖에 모르는 듯하지만, 내면의 순수한 진심이 있는 고주연이 우연히 10대 미혼모 단지(김현수 분)를 알게 된 뒤 "아이를 낳으면 내가 키우겠다"고 그와 약속한다. 그리고 대국민 사기극을 펼치는 이야기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구조이지만 좀더 안을 들여다보면 인간의 결핍과 대안 가족에 문제점을 짚어낸다. 예상가능한 타이밍에 밀려오는 감동인데도 여운이 깊다. '굿바이 싱글'이 전형성을 탈피하게 된 데에는 김혜수의 공이 크다.
"3년 전에 시나리오를 읽었어요. 시나리오 안에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았어요. 코미디여서 선택한 것은 아니에요. 웃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요. 그리고 이 영화가 전형적인 영화 맞죠. 익숙한 수순이에요. 영화를 작업하면서 가장 중요했던 건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전형성 속에서 어떻게 이 이야기가 갖고 있는 진심을 전달할 것 인가였어요. 실제 시나리오 상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진심이 있었거든요."
극 중에서 김혜수가 연기한 고주연은 이제껏 그가 맡았던 역할 중 가장 파격적이다. 중학생 이하 수준의 단어를 구사할 뿐 아니라 다소 맹하고, 자기 멋대로다. 주연이 사고를 일으키면 친구이자 스타일리스트인 평구(마동석 분)가 수습한다. 그간 그가 선보여온 지점과 매우 다른 깊이가 얕은 캐릭터다. 김혜수가 이 작품을 선택하기까지 용기가 필요해보였다.
"코미디다 보니까 용기가 필요했죠. 전 좀 지나치게 유머 감각이 없거든요. 유머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부분이 있어요. 또 과장된 연기를 하는 것 자체가 자신이 없어요. 그럼에도 이 캐릭터에 매료됐던 것은 깊이가 얕음에도 인간으로 보이는 진심이 강렬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주연만의 방식으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왔어요."
김혜수. 사진/쇼박스
"이 세상에 위기를 자초하는 인간이 어디 있나요"
김혜수가 말한 이 영화의 메시지는 후반부 만삭이 된 단지가 꿈을 찾기 위해 미술대회를 나가는데, 학부모들이 자기 자식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며 대회 참가를 막는 시퀀스에 가득 담겨 있다. 단지가 꿈을 찾기 위해 도전하는데,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대회 참가조차 가로막히는 상황에 주연이 나타나 학부모들을 설득하는 장면은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시종일관 웃음을 자아내던 영화는 이 장면에서 관객들에게 먹먹함을 안긴다.
"학부모들 앞에서 나서는 신은 정말 중요했어요. 이 영화의 핵심이잖아요. 어떻게 우리가 이 진심을 보이느냐를 정말 끝도 없이 고민했어요. 가장 중요했던 건 대사였어요. 그 장면만 생각하면서 수도 없는 대사를 만들었고, 아이디어를 냈어요. 촬영 전날 잠도 못 잤어요. 그 신은 50번도 넘게 촬영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50번이요. 얼마나 많은 숫자인데요."
깊이가 얕은 주연이라서 당시의 대사가 더 가슴에 와 닿는다. "단지는 다른 친구들과 배만 다르다"면서 울분을 터뜨리는 김혜수의 얼굴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 신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얘도 다 사정이 있었겠죠'였어요. 10대가 임신을 한 게 잘했다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여자로 태어나서 미혼모가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위기를 자초하는 인간이 어디 있어요. 미혼모는 당면하게 된 상황인거죠. 그리고 또 날카롭게 저를 자극한 대사가 있어요. 단지 대사인데 '꿈을 위해서 아이를 포기한다'는 내용이요. 자신이 꿈을 펼치며 살아가기 위해 아이를 포기해야만 하는 이 사회 구조가 현실적인 것 같기도 해서 마음도 아프고 저를 찌르더라고요."
김혜수. 사진/쇼박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사람, 만날까 두렵다"
작품 이야기가 시작되자 김혜수는 약 20여 분간 쉬지 않고 속마음을 털어놨다. 이 한 작품을 위해 셀 수 없는 시간과 진심을 쏟아 부었기 때문일까, 그는 이야기를 나눌 때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또 김혜수는 영화계에서 프로페셔널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영화 시상식 진행을 수년째 맡고 있는 김혜수는 노미네이트 된 거의 모든 작품을 보고 진행을 한다고 한다. 약 3시간여의 진행을 위해 수십 배의 시간을 사용한다. 시상식을 보면 수상자의 이름이 호명됐을 때 그를 소개하는 김혜수의 멘트는 영화를 봐야지만 알 수 있는 깊이가 담겨 있다.
"제가 시상식 하기 전에 영화를 다 본다고 알려져 있는데, 저 다 못 봐요. 그 많은 영화를 다 어떻게 봐요. 최대한 많이 보려고 노력하는 거죠. 당일 날 일찍 현장에 가서 대본을 다 수정해요. 방송 작가들이 쓰는 대본은 어쩔 수 없이 형식적인 게 많아요. 예를 들면 '최고의 한류스타' 이런 내용이 적혀 있어요. 그렇게 소개하는 건 제가 너무 싫어요. 그런 멘트를 다 수정해요. 현재 작품 속의 인물에 맞게 그 배우를 빛나게 소개해주고 싶어요."
물론 시상식의 진행자라는 역할 역시 비중이 작은 건 아니다. 그럼에도 수십 시간을 사용하는 김혜수가 보이는 노력은 주어진 역할의 몇 배 이상으로 여겨진다. 단 하루의 시상식 진행자로서 이런 태도를 보이는데, 그가 메인으로 나서는 작품을 위해서는 얼마나 혼신의 힘을 다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작품을 준비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팀을 이루고 영화를 만들어요. 나름 자신을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거예요. 그럼 잘해야죠. 못하면 잘못한 거예요.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잘할 수 있는 것으로 끌어올리는 게 저희가 할 일이에요. 배우를 포함해 스태프 모두가 그렇게 잘하려고 일을 하면 정말 일하는 것 같아서 좋아요. 제가 가장 두려운 건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에요. 안 될 것 같아도 최종까지는 해봐야죠. 하다하다 안 되면 그 때서야 다른 방법을 찾아야죠. 해보지도 않고 '안돼'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일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사람과 일할 때 만나는 것이 싫고 두려워요."
김혜수. 사진/쇼박스
"내가 생각하는 배우란 직업은"
1986년 영화 '깜보'로 데뷔해 벌써 30년차 경력을 기록하고 있는 김혜수다. 출발선부터 꼭짓점에 있었던 그는 여전히 꼭짓점에 있다. 30년 동안 배우라는 타이틀을 갖고 살아온 그는 배우라는 직업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앞으로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배우의 배(俳)는 한자로 '사람 인'에 '아닐 비'가 합쳐진 글자고, 우(優)는 뛰어날 우를 써요. 사람이 아닌 일을 뛰어나게 하라는 것인데 단어 자체가 모순인 거 같아요. 제가 처음부터 이것을 알고 시작하진 않았는데 해보니 그렇더라고요. 연기를 시작할 때도 내가 40대까지 연기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구체적으로 다른 일을 하겠다고 하는 건 없었지만 이만큼 할 줄 몰랐어요. 지금까지 계속 배우를 할 수 있었던 건 내 인생에서 가장 반짝거렸던 시기를 배우로 보냈기 때문인 거 같아요. 배우로 활약하면서 일말의 의미라도 나 스스로를 찾고 싶었는데, 그게 마지막까지 걸려서 그만두지 못했고, 아직까지 이렇게 하고 있네요. 앞으로 어떻게 살지 목표도 기준도 뚜렷하게는 없어요. 얼마나 해야 뭔가를 이룬 건지도 모르겠어요. 다만 현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나의 장점을 발휘하는데 집중하면서 살고 싶어요."
함상범 기자 sbrai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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