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버블경제 붕괴 후 ‘잃어버린 25년’ 중 딱 한번 일본경제가 빛을 발한 때가 있었다. 거센 당내 저항을 극복하고 5년5개월의 총체적 구조개혁으로 일본을 다시 일어서게 한 고이즈미 내각(2001~2006년) 시기가 바로 그 때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의 ‘개혁의 리더십’을 심층 분석한 책을 내기도 한 김정수 박사(전 한국무역협회 통상자문역)의 분석을 통해 지금의 한국 상황을 진단해 보기로 한다. <편집자>
모든 이, 모든 기업을 섬기는 ‘개혁의 리더십’
고이즈미 전 총리가 일본경제에 기여한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해야 하고 지도자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는 1990년대 초 이후 경기부양과 포퓰리즘으로 지탱되어 오던 ‘큰 정부’에 찌들어 ‘잃어버린 10년’, 그 제로성장의 늪에 빠진 일본경제를 구조개혁과 ‘작은 정부’로 자유롭고 경쟁적이며 활기찬 성장의 길로 들어서게 했을 뿐이다.
고이즈미의 ‘작지만 할 일을 하는 작은 정부’부터 새로운 게 아니었다. 그가 일본에서 개혁의 지도자로 나서기 전, 이미 미국에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영국에는 마거릿 대처 총리가 있었다. 그들이라고 특별한 것을 한 것은 아니다. ‘큰 정부’ 신봉자들에 의해 ‘신자유주의자’로 낙인찍힌 그들 3인은 좌우 이념에 경도되지 않은 전문가들의 일치된 충언과 사회적 합의를 선거를 통해 국민의 선택으로 확인하고 이를 정책으로 실행에 옮겼을 뿐이다. 그들은 공히 ‘개혁의 리더십’을 발휘했던 것이다.
여기서 ‘개혁’은 성장과 경쟁력 측면에서 경제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정책의 총화를 구축하는 것, 즉 구조개혁(structural reform)을 의미하고 ‘리더십’은 ‘국민과의 소통으로 국민의 지지로 정책 실행력을 갖춘 권위와 그 권위를 뒷받침하는 체제를 말한다.
이들 3인의 구조개혁은 부문이나 계층 간에 차별을 두지 않고 경제 전체를 개별 부문과 개별 경제주체가 유기적으로 연계된 총합체로 인식한다. 따라서 왜곡된 통념에 따라 ‘적폐청산’, ‘민주화’, ‘정상화’ 등의 이름으로(규제, 조세, 정부 개입과 간섭 등) 특정 부문이나 계층을 옥죄거나 부담을 주고, ‘국민 섬기기’, ‘동반성장’ 등의 이름으로 특정부문이나 계층을 보호하거나 지원하는 정책들과 대척점에 서 있다. 따라서 소득이나 경쟁력 측면에서 취약해 정부의 보호와 지원에 의존해 온 부문·산업·경제주체·계층 등이 경원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구조개혁인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라. 가까이는 일본, 멀리는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여러 나라가 구조개혁에 부심하고 있다. 재정, 고용유연성, 규제개혁, 경쟁제고, 조세부담 경감 등등 모든 선진국들이 우회전하고 있다. 한국만 좌회전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한국은 구조개혁이라는 글로벌 추세를 외면하고 있다. 아니 그 거대한 흐름을 거슬러 거꾸로 가려고 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속에서 제도적으로만 도입되고 경제관행으로는 정착되지 않은 정리해고 허용 등 이름뿐인 노동시장 유연화마저 철폐의 기로에 서있다. 경제민주화의 이름 아래 중소기업만 영위할 수 있는 업종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어렵사리 도입되기 시작한 성과급 제도는 되물림 당하고 있다.
지난 반세기 한국이 세계에 자랑하던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수십 년 노력으로 이제 겨우 구축되기 시작한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하루아침에 ‘기업하기 힘든 나라’로 변질되고 있다. 법인세는 올라가고, 근로시간은 줄어들고 임금은 올라가며 규제가 늘거나 강화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의 뒤에는 정부행동주의(government activism)가 자리 잡고 있다. 이대로 가면 규제와 간섭과 개입의 ‘큰 정부’가 들어서는 것은 불문가지다.
신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와 증세
새 정권의 국정기획위는, 지난 7월19일 향후 5년간 새 정권이 추진할 100대 국정과제를 발표했다. 그 정책 패키지는 손가락으로 ‘증세 없는 복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보수 성향 언론은 ‘정부의 복지 지출이 과다하다’, ‘재원 마련책이 너무 낙관적이다’고 비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진보 성향 언론은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박근혜 정부와 뭐가 다른가’라며 볼멘소리를 했다.
그 사이, 대형복지 사업 외 대부분의 100대 국정과제가 향후 한국의 시장경제 체제 유지 여부와 관련해 중요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에 외면당했다. 특히 ‘큰 정부’를 야기하게 될 ‘소득주도 성장’과 관련한 다양하고 심대한 정책과제들이 언론의 무관심 속에 묻혀 버렸다.
다음날 재원 부족에 대한 언론의 비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이번에는 경제장관회의와 여당과 청와대의 손가락이 ‘부자증세로 마련할 복지재원’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손가락의 지시에 여론은 충실히 따라갔다. 이제 언론은 복지와 그 재원마련에 대한 관심을 접어두고 모든 관심을 ‘증세’, 그것도 ‘부자 증세’에 쏟아 부었다.
이들 정책 전환은 당장 경제와 사회통합에 끼칠 직접적 부담 그 자체보다, 복지·증세 문제가 아무런 공개적 논의나 여론 수렴도 없이 청와대와 여당의 주도로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이 앞으로 두고두고 경제사회 시스템에 야기할 해악이 더욱 심대하다. 향후 복지나 증세 등 경제의 명운이 걸린 주요 국가과제가 경제논리를 뒷전으로 하고 정치논리에 의해 결정되고 추진되는 것이 관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 정권의 경제정책에 대해, 증세보다 100대 국정과제 중 경제과제가 지향하는 소위 ‘소득주도 성장’에 대한 우려가 더 깊고 크다. 간단히 말해 ‘소득주도 성장’은 최저임금 인상 등으로 임금 수준을 올리고, 공공 일자리 창출로 민간의 일자리창출을 유도하는 등으로 근로자의 소득을 늘려, 가계소비를 늘리고 이에 기업 투자도 유도해 성장률을 높이자는 것이다.
‘소득주도 성장’은 미국처럼 국내시장이 커 내수 그 중에서도 소비가 성장을 주도하는 나라에서 왕왕 시도되고 주장되기는 하나 인건비 상승으로 인한 기업의 경영악화와 재정지출 확대로 인한 정부 재정적자의 심화로 지속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판정난, ‘파탄의 성장 모델’(bankrupt unsustainable growth model)이다.
인위적인 임금인상과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은 단기적으로는 통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근본적이거나 지속가능한 해결책이 아니다. 공공부문을 확대시키고 그 비효율을 심화시킴으로써, 정부 재정 악화를 고착시키고 민간부문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등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성장을 저해한다는 것이 주류 경제학의 설명이자 역사적 교훈이다.
결국 ‘소득주도 성장’은, 단기적으로는 임금-일자리-성장 간의 선순환(최저임금인상+공공 일자리 확충→근로소득 증가→가계소비 증가→성장)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언젠가는 아니 조만간 임금의 인위적 상승→경영압박→투자위축→일자리 감소→성장 저하라는 악순환을 야기할 소지가 크다.
소득주도성장과 구조개혁
보수 정당의 지지기반이 분쇄된 상황에서, 신 정권에 의한 반 시장개혁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은 야당의 반대도 촛불 시위도 아니다. ‘경제상황의 악화의 뿌리가 반 시장개혁정책에 있다’는 국민의 자각만이 큰 정부로의 질주를 제어할 수 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새 정권이 이토록 서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포퓰리즘 정책으로 국내 경기를 반짝 띄우고 그 정책의 해악으로 국내 경제여건이 악화하기 전에, 또는 세계경제의 악화를 국내 불황 도래의 핑계로 더 이상 원용할 수 없게 되기 전에, 한국 경제사회 곳곳에 ‘큰 정부의 대못’을 박아놓겠다는 저의를 품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게 신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를 대하면서 가지게 되는 가장 큰 걱정이자 두려움이다.
구조개혁은 진입장벽을 철폐하는 등 규제개혁으로 경쟁을 제고하여 산업에의 진입과 퇴출을 통해 경제 전체가 더 경쟁력이 있는 구조로 바뀌게 하는 것이고, 노동시장 유연화 등 노동개혁으로 고용시장에의 진입과 퇴출을 통해 노동의 공급과 수요가 잠재적으로 경쟁력 우위가 예상되는 부문으로 전환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경제, 전 부문, 전 경제주체의 경쟁력 강화와 구조조정이 일상적으로 또 순조롭게 일어나게 하자는 것이다. 심지어 중국이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좌파 정권이 들어선 그리스, 이태리 등도 충격을 최소화하는 구조개혁의 도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 7월19일 오후 ‘100 + 새로운 대한민국’ 국정과제 보고대회가 열린 청와대 영빈관에서 김진표 국정기획자문위원장이 국정운영 5개년계획을 보고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국가미래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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