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리 5·6호기 원자력발전소 신축공사가 재개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론화과정을 거치겠다며 공사를 중단시킨지 3개월만에 다시 삽을 들게 된 것이다. 이번에 공론화과정을 맡았던 공론화위원회는 신고리 5호기와 6호기를 건설하되 원자력발전의 비중을 낮추라고 권고했다. 상당히 균형잡힌 결론이라 평가된다.
이같은 결론에 이르는 데는 원전 신고리 5호기와 6호기 공사가 제법 진행돼 왔다는 사실 자체가 한몫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상당부분 공사가 진행되고 적지 않는 자금이 투입된 상태여서 ‘매몰비용’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정사실로 굳히기 작업은 건설허가가 나기 이전부터 진행됐다는 지적이 있다. 한 보도에 따르면 최명길(국민의당) 의원이 한국수력원자력으로부터 제출받은 국정감사 자료를 토대로 내놓은 자료를 내놓았다.
신고리 5호기와 6호기는 지난해 6월23일 건설허가가 나기 전에 이미 1조1576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됐다는 요지의 자료였다. 지난 7월 공사가 임시로 중단될 때까지 투입된 1조6838억원 가운데 3분의2 가량은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정식 건설허가 이전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번에 공론화위원회가 공사를 종결하기로 결정했다면 이는 글자 그대로 ‘매몰비용’이 되는 것이다. 한수원은 그 이전에도 당국의 승인을 필요로 하는 사업의 경우 사전에 수조원을 투입함으로써 기정사실로 굳히곤 했다고 최 의원은 지적했다. 이를 뒤집으면 국가경제와 회사에 엄청난 손실과 낭비가 빚어진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수법을 써왔다고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번에 공론화과정을 거쳐야 했으니 한수원은 공론화위원회의 논의과정을 몹시 초조하게 지켜봤을 것이다. 만약에 공사중지 결정이 내려진다면 막대한 손실이 발생할 수도 있었으니까.
이렇듯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 부작용이 두렵기 때문이다. ‘기정사실’로 굳어진 것을 뒤집는 데는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런 두려움을 이용해 무엇이든 기정사실로 굳혀놓으면 된다는 식의 악습이 지금까지 널리 통용돼 왔다. 그리고 그렇게 굳혀진 것은 이미 멍에가 되어 떼어내기가 힘들다. 말하자면 ‘고급 알박기’의 마법이다.
인터넷전문은행 케이뱅크의 인가논란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케이뱅크의 최대주주인 우리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 비율이 기준미달임에도 금융위에서 예비인가해 준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지적이 국정감사에서 거듭 제기됐다. 그러나 이에 대해 최흥식 금융감독원장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금융위원회의 유권해석도 인정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금융감독원 나름대로 부적합다고 판단했지만 금융위에서 반려된 것이기에 이제 어쩔 수 없다는 논리였다.
사실 이제 와서 어찌하겠는가. 케이뱅크는 최초의 인터넷전문은행으로 출범해 1차례 증자까지 하고 적지 않은 고객까지 확보됐다. 설사 인가과정이 잘못되었음이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기정사실의 멍에를 떨쳐내기란 역시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국정감사에 참여한 국회의원도 앞으로 소신껏 감독정책을 펴달라고 주문할 뿐이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서 핵심 논란의 대상이 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취소소송도 마찬가지이다. 수십조원의 자산을 가진 재벌회사의 합병을 손바닥 뒤집듯이 취소시키기는 쉽지 않다. 법원으로서도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기정사실’로 굳어진 사안들의 공통점은 대체로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과정을 밟으면 실행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공정한 평가와 합리적인 절차가 이행됐다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며, 케이뱅크도 법인설립 등기를 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대통령선거 국면에 미국의 사드미사일이 조급하게 배치된 것도 그런 경우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명박정부에 의해 강행된 4대강 사업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고급알박기’의 마법이 아니라면 달리 설명이 잘 안된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이같은 고급알박기의 마법은 없어져야 한다. 그러려면 경우에 따라 기정사실로 굳어진 것도 과감하게 정리하는 것도 필요하다. 때로는 매몰비용의 손실도 감수해야 한다. 당장 뼈아픈 것은 사실이지만 훗날을 위한 보약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가장 바람직한 것은 사전에 냉정하고 치밀한 검토를 마치는 것이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선진화의 길이다.
차기태(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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