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지은 기자] 메모리반도체 시장을 이끄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활약으로 전세계 반도체 산업의 지형도가 바뀌고 있다.
한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권 지역의 시장점유율은 지속해서 상승한 반면, 90년대 반도체 종주국으로 불리던 일본의 점유율은 확연히 낮아졌다. 지속적인 투자로 경쟁사와 초격차 전략을 펼친 한국과 달리 일본은 선제적 시장 대응에 실패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는 분석이다. 종주국 일본과 후발국 한국의 지위가 역전된 사이 미국은 점유율 하락 없이 반도체 강자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기술 진입장벽이 높은 시스템반도체 시장에서 인텔과 퀄컴을 중심으로 선두자리를 꿰찼다.
16일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전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을 대표로 하는 아시아권 국가들의 점유율은 1990년 4%에서 1995년 9%, 2000년 17%, 2005년 23%, 2010년 25%로 계속해서 상승했다. 특히 삼성전자가 D램 시장에서 초격차 전력을 활발히 펼친 2010년 이후 점유율이 빠르게 올라 지난해에는 38%로 7년 만에 13%포인트 증가하는 가장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반면 일본의 점유율은 1990년 49%에서 2000년 25%로 추락한 뒤 2010년 17%에서 지난해 7%대로 다시 급감했다.
이는 적기 투자로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이 영향력을 키운 반면 일본 기업들은 빠르게 바뀌는 반도체 시장에서 제때 투자가 이뤄지지 않은 데다, 치킨게임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일본은 NEC·히타치·도시바·마쓰시타(현 파나소닉)를 중심으로 1980년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호령했다. 이들은 1980년대 세계 1~3위를 휩쓸며 상위 10위권에 무려 6개사가 이름을 올렸다. 세계 D램 생산량의 75%를 독점할 정도. 하지만 미국이 특허권 등으로 일본 업체들을 압박했고, 삼성전자 등 한국기업들도 저가 공세로 위협했다. 특히 2007년 시작된 애플의 스마트폰 혁명으로 반도체 수요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한 것이 한일 간 양상을 뒤바뀌게 한 결정적 요인으로 지목된다. IT기기의 주도권이 PC에서 스마트폰으로 넘어갔음에도 일본 업체들은 PC용 반도체에 주력하다가, D램 가격이 급락하자 회생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IC인사이츠는 "NEC, 히타치, 미쓰비시, 마쓰시타 같은 일본의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상위 명단에서 사라졌다"면서 "현재 진행 중인 도시바 메모리사업부 매각마저 마무리되면 일본 기업들의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더 낮아질 것"으로 진단했다.
반면 삼성전자는 대규모 투자를 지속적으로 단행하며 초격차 전략을 펼쳤다. 2010년~2011년 10조원 수준이던 반도체 시설투자가 지난해에는 27조원에 달했다. SK하이닉스도 2013년 3조원 중반대이던 투자금액이 지난해에는 10조원을 넘어섰고, 올해는 13조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R&D와 시설투자에 거액을 쏟아부어 한 발 앞선 기술을 개발한 뒤 대량생산으로 가격을 낮추면서 다른 업체가 따라올 수 없도록 초격차 전략을 이어갔다. 실제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 2세대 10나노급 D램을 본격적으로 양산하면서 경쟁사와의 기술 격차를 1년가량 벌렸다. SK하이닉스도 비슷한 시기에 10나노급 D램 제품 양산에 돌입했다.
모바일 시대로 이동하면서 메모리반도체 시장 규모가 커진 것도 한국 반도체에 힘을 실어줬다. 시장조사업체 IHS마킷에 따르면 낸드플래시의 경우 2001년 8억달러에서 지난해 539억달러까지 급격하게 성장했다. D램 역시 1999년 207억달러에서 지난해 735억달러로 2배 이상 증가했다. D램 시장에서 한국의 점유율 합계는 73%, 낸드플래시 시장에서는 40%에 달한다.
한일 간 반도체 산업의 희비가 갈리는 사이 미국의 점유율은 우상향을 보이며 견고함을 보였다. 1990년 38%였던 점유율은 1995년 47%로 뛰어올랐고, 이후 꾸준한 점유율을 기록하며 시장 상위를 유지했다. 지난해에는 49%에 달했다. 반도체의 또 다른 축인 시스템반도체에서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반도체 설계 분야인 시스템반도체에서 한국의 점유율은 3%에 불과하지만, 인텔과 퀄컴을 중심으로 한 미국 업체들은 과점을 넘는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미국의 안정된 점유율에 주목하고 있다. 수요와 경쟁업체들의 생산시설 확충에 따라 부침이 심한 메모리반도체와 달리 시스템반도체는 숙련된 기술인력과 장기 개발이 요구돼 견고한 사업구조를 만들 수 있다. 특히 사물인터넷(IoT) 관련 센서·통신 수요가 증가하면서 수요도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 관계자는 "시장을 호령하던 일본의 몰락을 떠올리며 미래 반도체 시장 변화 흐름을 읽고 미리 준비해야 한다"며 "경기 변동 영향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고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시스템반도체 분야에도 집중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지은 기자 jieunee@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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