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경 사회자본연구원장
"불가사리 쇠 집어먹듯 한다"는 설화가 있다. 여기에서 불가사리는 바다의 생물이 아니라 고려 말 송도에 나타났던 상상의 괴물을 일컫는다. 일찍이 남편을 잃고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던 과부의 몸에 어느 날 딱정벌레처럼 생긴 물체가 기어 다녔다. 이 벌레는 음식들을 외면하고 바늘을 먹었다. 그 후 벌레는 집안과 동네의 쇠붙이들을 삼키고 온 나라의 쇠붙이들을 먹어치워 "죽일 수 없는 괴물"로 커졌다. 이 불가사리가 어떻게 없어졌는가에 관해서는 이야기들이 갈린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출범을 앞두고 진통이 많은 사태를 보니 촛불로 출범한 정부에서도 공직사회에 불가사리 같은 존재들이 많은가 보다.
근자에 벌어지는 각종 민원들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우리 공직사회에서도 적지 아니한 불법이 합법을 가장하고 횡행한다. 검찰에 고발하여도 유야무야되고 마는 일들이 벌어진다. 어느 단체의 한 관계자는 조직 내부의 오랜 재정 비리를 감독관청에 제보하였다. 감독관청은 오랫동안 사건을 조사하여 비리로 판단하고 행정징계 조치를 취하는 한편 범죄 혐의가 있다고 보아 사건을 검찰로 송치하였다. 하지만 담당 검사는 "범죄혐의가 증명되지 아니한다"면서 기소하지 아니하였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감독관청이 사건 관계자들을 중징계하였고 관할 검찰청의 전임 수사관이 "범죄혐의가 짙다"고 판단한 사안을 검사가 물리침으로써 불신의 여지를 낳았다. 수사권도 없는 고소인이나 고발인이 범죄혐의를 입증하라는 요구는 전대미문이다.
교묘한 회피도 곳곳에서 판을 친다. 강북에 사는 L씨는 선대부터 살 던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내 토지와 집이 수용 당하자 인근 지자체에 이축을 신청하였다. 개발제한구역법은 이 경우에 "취락지구로 이축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인근 지자체에서는 “해당 주택이 수용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철거되어야 건축허가를 내 줄 수 있다”고 버틴다. 하위법령에 상위 법률에 없는 '철거'를 이축의 요건으로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즉 "주택을 수용한 사업자가 해당 주택을 철거하지 아니하면 이축을 허가하지 않는다"는 취지인데 이는 상위 법률이 모르는 일이다. 하위법령 제정과정에서 입법자가 재량으로 끼워 넣은 요건이다. 수용한 주택을 철거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피수용자의 권능 밖의 일이다. 사업자인 관할 구청은 이 주택을 교육관으로 쓴다면서 철거를 미룸으로써 피수용자의 권리를 봉쇄한다. 합법을 가장한 불법이다.
한시적 특별법에 의하여 활동하는 특별행정기관에서도 합법을 가장한 불법이 자행된다. 이 행정기관은 불특정 다수에 대한 범죄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신속하고 공정하게 구제하기 위한 활동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외부에 연구용역을 맡겼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해당 사건에서는 피해를 야기한 소수의 사업자와 피해를 당한 다수의 피해자들이 존재한다. 연구진은 피해자 중심주의에 입각하여 연구를 수행하였으나 그 결과가 사업자들에게 매우 불리하였다. 사업자들은 몫돈을 출연하여 재단법인을 세우고 이로써 모두 면책을 받고 싶어하였다. 하지만 눈치 없는 연구진은 이를 외면하고 재단을 세우더라도 피해자들이 구제안에 합의하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에 사업자들의 책임이 면제되지 아니한다는 결론을 제시하였다.
특별행정기관 관계자들은 용역 기간을 두 차례 연장하면서 연구진에게 모종의 신호를 보냈다. 연구 결과에 대하여 이것저것 시비를 걸면서 모든 연구내용이 '미흡하다'는 요구가 이어졌다. 이 기관의 관계자들은 합의 모형이 멀쩡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형이 없다"고 주장하고, 피해자들을 초청하여 수차례 공론화를 진행하였음에도 공론화가 없다느니, 또 인용한 수치가 틀렸으며 언론보도를 일일이 확인하지 않고 인용하였다는 등의 갖가지 구실을 붙여 연구 결과를 뒤집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사업자가 아닌 피해자들의 구제에 중점을 두었던 연구진은 곡학아세할 수 없었다. 결국 발주처는 대금감액도 아닌 계약해지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택하였고 조달청은 이에 호응하여 연구기관과 연구책임자 양쪽을 '부정당업자'로 몰아 조달시장에서 퇴출시켰다.
합법을 가장한 불법 내지 탈법 사례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촛불을 켜들어도 나랏님이 아무리 간곡히 호소하여도, 부패를 부패라고 생각하지 않고 직권으로 여기는 담당자들의 은밀하고 교묘한 탈법과 왜곡을 막기 어렵다. 포청천이 부활하여야 할까? 공수처가 출범하면 고위공직자들의 비위를 다스리겠으나 이 범주를 벗어나는 중하위 공직자들에 대하여서는 현재와 같은 사법체계에서는 방법이 없다. 많은 사람들은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이 힘겨루기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하지만 검찰총장을 교체하고 공수처가 출범한다고 하여 검찰 개혁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검찰개혁은 경찰과 특별사법경찰기구 그리고 각급 법원을 포함한 사법제도 전반을 손질하는 가운데 이뤄져야 한다. 검찰의 무소불위를 보장하는 기소독점주의도 같은 맥락에서 재고되어야 한다.
전재경 사회자본연구원장(doctorchu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