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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일제강점기, ‘불국사’를 절창한 일본 시인이 있었습니다
입력 : 2023-02-14 오전 6:00:00
‘경주 불국사 근처에서’라는 부제를 붙인 「겨울날(冬の日)」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아아 지혜는 이러한 조용한 겨울날에/ 그것은 문득 뜻하지 않은 때에 온다/ 인적 끊긴 곳에/ 산림에/이를테면 이러한 절간의 뜰에/ 예고도 없이 그것이 네 앞에 와서/ 이럴 때 속삭이는 말에 믿음을 두어라/ 「고요한 눈 평화로운 마음 그 밖에 무슨 보배가 세상에 있을까」
 
전체 5연 50행의 장시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첫째 연입니다. 시를 곱씹어 읽다 보면, 특히, 마지막 8행 “「고요한 눈 평화로운 마음 그 밖에 무슨 보배가 세상에 있을까」”에는 이 작품의 주제로 받아들일 만한 견고함 같은 것이 배어 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불국사의 깊이를 읽어내려는 시인의 심안(心眼)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기 때문이지요. 그 심안은 무척이나 맑고 깊어, 독자들에게 강하게 뿌리를 내립니다. 이 구절은 이 시가 명작으로 평가받는 중요한 기능을 할 뿐 아니라, 동시에 일본인에게 불국사를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시의 마지막 5연에도 되풀이되어 나옵니다.          
 
시는 또, 2연, 3연, 4연에서 불국사와 그 주변 경관, 그리고 화자의 심정을 그려냅니다.      
 
(전략) 비바람에 시달린 자하문 두리기둥에는/ 그야말로 겨울 것이 분명한 이 아침의 노랗게 물든 햇살/ 산기슭 쪽은 분간할 수 없고 어슴푸레 안개 속에 사라진 저들 아득한 산꼭대기 푸른 산들은/ 그 청명한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 모호한 안쪽에서/ 공간이라는 유구한 음악 하나를 연주하면서/ 이제 지상의 현실을 허공의 꿈에다 다리 놓고 있다// 그 처마 끝에 참새 떼 지저귀고 있는 범영루 기왓골 위/ 다시 저편 성긴 숲 나뭇가지에 보일 듯 말 듯 하고 / 또 그쪽 앞의 조그마한 마을 초가집 하늘까지/ 그들 높지 않고 또한 낮지도 않는 산들은/ 어디까지고 멀리 끝없이/ 고요로 서로 답하고 적막으로 서로 부르며 이어져 있다// 그렇게 나는 이제 이 절의 중심 대웅전 툇마루에/ 일곱 빛 단청 서까래 아래 쪼그려/ 부질없는 간밤 악몽의 개미지옥에서 무참하게 지쳐 돌아온/ 내 마음을 손바닥에 잡듯이 바라보고 있다 (후략)
 
화자는 “자하문”, “범영루”, “대웅전” 등을 중심으로 불국사가 지닌 오랜 역사성을 묘사하면서, 절과 절을 둘러싼 공간과 시간을 함께했으면 하는 의도를 드러냅니다. “공간이라는 유구한 음악 하나를 연주”(2연) 한다거나, “고요로 서로 답하고 적막으로 서로 부르며 이어져 있”(3연)다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이 절의 중심 대웅전 툇마루에/ 일곱 빛 단청 서까래 아래 쪼그려/ 부질없는 간밤 악몽의 개미지옥에서 무참하게 지쳐 돌아온/ 내 마음을 손바닥에 잡듯이 바라보고 있다(4연)”는 서술에 이르면, 풍경을 바라보는 시인의 내면이 읽힙니다. 그것은 곧 계절의 추이도 자연의 이치도 이곳 불국사에서 발현한 것이라는 함의가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이 시는, 천년 고도 경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인 불국사라는 역사의 현장과 그 장구한 역사에 동화되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가 드러난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 시를 쓴 사람은 일본인에게는 국민 시인으로 불릴 만큼 잘 알려진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 1900-1964). 도쿄대학 불문과 출신인 그는 1940년, 일제강점기 때 불국사를 찾아 그 감흥과 희열, 그리고 인생을 관조하는 깊이를 「겨울날」이라는 시로 풀어냈습니다. 그는 한국의 오랜 유적이 있는 경주와 부여 등을 찾아, 신라와 백제의 역사를 떠올리며 여러 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 작품들은 성격상, 한반도의 역사와 호흡하려는 개방된 의도를 보여줍니다. 물론, 이러한 문화적 개방성은 일본이라는 민족, 국민, 국가 단위에 그치는 범주를 넘어서 장구한 역사, 보편적인 가치와 소통하겠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그는 1960년에도 불국사를 노래한 시 「백 번 이후(百たびののち)」를 발표하여, 또다시 불국사에 대한 그리움을 표출하기도 합니다. 시의 마지막 두 개의 행, “나를 위해서는 참으로 좋은 노래를 들려주신 불법(佛法)의 동산/ 백 번 이후에 청명하게 다시 생각한다 그 아침의 맑고 고움을”에는 불국사에 대한 시인의 변함없는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서로의 나라에 호감을 가지는 비율이 늘어가고 있는 요즘, 미요시 다쓰지의 시 「겨울날」을 읽으며, 서로의 문화유산에 대한 존중과 관심이 높아졌으면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혹한이 많았던 날들은 가고 봄이 기웃거리는 지금은 입춘이 막 지난 무렵. 

오석륜 시인·번역가/ 인덕대학교 비즈니스일본어과 교수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홍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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