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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있는 집주인
입력 : 2023-05-03 오전 8:12:59
운이 좋았습니다. 결혼한 뒤 세번째로 만난 집주인은 '믿을 수 있는 집주인'이었습니다. 공인중개사는 404호 집주인에 대해 "이 집은 집주인이 은행을 다녀서 아주 믿을 만 하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 이라는 생각을 잠시 했어요.
 
전세시장에서 세입자는 공인중개사(중개인)와 임대인 사이에서 항상 을이지요. 제한된 정보 속에서 이들의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어요. 그냥 회사원 보다 은행에 다닌다고 하니 '믿을만 하다' 생각했지요.
 
거래날. 실제로 만난 404호 집주인은 말끔한 양복을 입고 나타났어요. 감색 수트를 빼입었는데, 아저씨 치고 똥배도 나오지 않고 슬림했어요. 40대 중반이었지만 매우 날렵하고, 스마트한 모습이었습니다. 자켓 한쪽에 은행 뱃지를 달고 있었어요. 은행뱃지가 몇개가 되는걸까, 모든 옷에 배지를 달아놓았을까. 양복을 바꿔입을때마다 바꿔 넣는 것일까, 직장 뱃지를 옷에 달고 다니는 저 자신감은… 쓸데없는 생각에 빠진 것도 잠시.
 
"아 죄송합니다. 제가 업무 중에 나와서 좀 늦었습니다. 제가 404호에 산지는 좀 되었는데 동네 사람들과도 아주 친해요. 동네 몇몇 형들과 가끔 치킨 시켜먹고, 아파트 앞에 있는 정자에서 수다도 떨고 그렇습니다"
 
멀끔한 집주인은 자신이 이 아파트에서 얼마나 신망을 받고 있는지, 집에 거주하면서 어떠한 마음으로 집을 리모델링하고, 왜 떠나게 되었는지까지 상세히 설명해 주었어요. 동대표 회의에도 참여하며 아파트 관리에도 힘쓰고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바쁜 집주인이 떠나자 공인중개사 아주머니의 부연설명이 이어졌어요.
 
"이 집주인이 은행 부부야. 둘다 *협에 다니는데 차장이래요. 아 근데 집에 아이는 없고, 글쎄 이동네 저 신축 아파트 분양권을 샀더라는거야. 그 집에 들어가느라고, 404호를 저렇게 고쳐놓고 이사간다고, 애기엄마는 운 좋은거야. 이 아파트에서 이 집이 제일 좋다구"
 
공인중개사 아주머니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2017년의 일이니 벌써 6년전이네요. 그때는 믿을만한 집주인을 누구나 모두 만날 수 있는 줄 알았는데요. 인천 전세사기 피해 사례들이 담긴 기사를 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믿을 수 있는 집주인은 404호를 떠나는 날까지 젠틀했습니다. 집주인은 전세 기간 중 집을 팔았는데 그 과정에서도 그의 일처리는 아주 깔끔했어요. 항상 양해를 구했고, 미안하다고 했으니까요. 한마디로 교양이 있는 집주인이었습니다.
 
기억을 돌이켜보니, 404호 이전 1107호 집 주인은 삼성계열사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들었던 것 같아요. 전세시장에서 약자 위치에 놓일 수 밖에 없는 세입자는 집주인과 공인중개사가 마음만 먹으면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사례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모두 404호 집주인 같은 사람만 만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냥 저는 운이 좋은 편에 속했던 것 뿐이에요. 
 
누구나 사기 대상이 될 수 있고, 누구나 수천만원, 수억원의 전세금을 날릴 위기에 처할 수 있습니다. 전세사기 피해사건이 그냥 사건으로만 넘어가서는 안되는 이유입니다. 
 
전세사기 특별법에 피해자 구제도 중요하지만 더 장기적으로 준비하고 따져보아야할 것은, 범죄에 가담한 공인중개사들에 대한 철저한 사법적 처리와, 공인중개사 자질 제고 방안 그리고, 전세 및 부동산 관련 정보 및 교육의 내실화일겁니다. 믿을 수 있는 집주인과 공인중개사를 선택하고, 거르는 방법, 항상 인지하고, 기억해야합니다.
 
그래도 모르겠어요. 주머니 사정이 열악하면 감언이설에 속지 않을 재간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주거난에 시달리는 2030을 위한 대책,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할까요. 
 
1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 인근에서 열린 전세사기피해자 대책위의 전세사기피해자 대책 마련 촉구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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