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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게이션)‘비닐하우스’, 존재로서 느껴야 할 ‘부채’의 무게
거주의 공간·욕망의 상징, ‘비닐하우스’의 불투명과 불확실성
입력 : 2023-07-17 오전 7:00:38
[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어떤 시선으로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이 영화의 의미는 변화 무쌍할 듯합니다. 감독의 설명처럼 돌봄에 대한 역설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돌봄의 공간이 될 집에 대한 의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기대와 현실의 역행 관계를 그리는 이른바 운수 좋은 날법칙에 대한 영화적 시선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가장 강렬하게 다가오는 건 존재적 가치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판단력일 듯합니다. ‘존재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옳고 그름의 판단을 받을 존재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을 만들어 봤습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존재의 옳고 그름은 이미 존재하는 우리, 또는 다른 누군가의 판단 근거 대상은 아닙니다. 그래서 묻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시선으로서 이 여자, 옳고 그름의 경계만으로 보자면 과연 어느 쪽인지. 그저 간절히 바란 것에 대한 소망, 그것이 인과 관계로 인해 가장 극단적 이유와 원인을 만들어 낸 근거라면 그건 죄악일지. 아니면 욕망일지. 그것도 아니면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본능일지. 각자의 판단과 근거를 갖고 이 여자의 본질을 논하는 것이 무의미에 가까울지.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 여자를 여기까지 몰아 세운 그것은 무엇일지. 영화 비닐하우스가 담고 있는 극단적일 정도로 잔인한 시선은 폭력을 넘어 인격 살인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극중 문정’(김서형)이란 여성이 겪고 당하는 일상의 루틴은 하루하루가 표현 불가능한 고통 그 자체입니다.
 
 
 
영화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문정의 모습, 충격적입니다. 자해입니다. 행동 양식으로 해석한 설명. 분명 자해입니다. 하지만 그건 문정에게 자해인지, 우리 시선과 우리 감정이 느끼는 통증과 고통의 영역에서 풀어볼 수 있는 자해인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현실의 일반화로 그걸 돌려보면 힌트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이 그를 제외한 세상 모두에겐 존재하지 않는것처럼 말입니다. 첫 장면부터 비닐하우스의 통렬한 시선이 관객의 시선을 폭행합니다.
 
영화 '비닐하우스' 스틸. 사진= ㈜트리플픽쳐스
 
문정은 치매 노인 집을 방문하는 요양 보호사입니다. 중증 치매를 앓는 할머니와 그의 남편 태강(양재성). 태강은 후천적 시각 장애인입니다. 아내인 할머니는 이미 현실 자체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남편 재강은 전혀 앞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문정은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수 많은 상처를 받은 듯한 내면을 갖고 있는. 한 마디로 스크린 속 세 사람. 아프고 아프고 또 아픈 그들입니다. 이렇게 힘들 수가 없습니다. 더 이상 힘들 것도 없습니다. 문정의 하루가 그렇습니다. 문정은 그렇게 그 안에서 겨우 살고 겨우 숨쉬고 간신히 버티고 있습니다.
 
영화 '비닐하우스' 스틸. 사진= ㈜트리플픽쳐스
 
일단 문정,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존재하는 비닐하우스에 삽니다. 남편은 죽은 듯합니다. 그리고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죄를 지었는지 소년원에 수감돼 있습니다. 문정은 그런 아들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 미안해 합니다. 너무 미안해 합니다. 그런 문정의 꿈이자 바람은 아들이 출소하면 함께 살 집을 마련하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누추하다 못해 집 이라고 할 수 없는 비닐하우스뿐 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뤄질 것이라 믿습니다. 아들의 출소 몇 년 전부터 마음에 드는 전셋집 하나를 틈날 때마다 가서 보고 또 봅니다. 이제 그 꿈이 손에 잡힐 듯합니다.
 
영화 '비닐하우스' 스틸. 사진= ㈜트리플픽쳐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날이 밝았고, 태강과 그의 아내가 사는 집에 방문했습니다. 아내인 할머니를 목욕시킵니다. 밥도 떠먹여 줍니다. 온갖 수발, 다 들어줍니다. 그냥 그게 너무도 익숙해 보입니다. 갖은 수모를 당하지만 문정은 개의치 않습니다. 그런데 그날이었습니다. 의도한 건 아닙니다. 분명 실수였습니다. 태강의 아내이자 문정이 돌보는 치매 할머니 화옥이 죽었습니다. 문정의 실수 때문이었습니다. 문정은 당황합니다. 휴대폰으로 119를 누릅니다. 그때였습니다. 출소를 앞둔 아들이 소년원에서 전화를 합니다. ‘엄마와 함께 살고 싶다말합니다. 그 말이 방아쇠였습니다. 문정은 혼란스럽고 당황스럽고 무섭습니다. 하지만 몸은 이미 움직입니다. 이제 이 집에서 할머니 화옥은 죽은 게 아닙니다. 여전히 살아 있는 겁니다.
 
영화 '비닐하우스' 스틸. 사진= ㈜트리플픽쳐스
 
문정은 불안합니다. 모래 위에 쌓은 성이 무너질 것 같은 불안. 태강의 집에서 화옥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화옥은 살아 있습니다. 죽었는데 살아 있다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문정이 불안합니다. 그런 문정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존재. 순남(안소요)입니다. 순남은 문정이 다니던 치료 모임에서 만난 여인입니다. 3급 지적장애인 순남은 알게 모르게 문정의 일상 속으로 파고 듭니다. 화옥이 죽은 뒤 불안이 가중되는 상황 속 순남의 순수한 무례는 관심과 갈구의 경계 어딘지 모를 감정으로 다가옵니다. 문정은 어디에서도 존재할 수 없는 혼란과 혼돈에 휩싸입니다. 이제 문정에겐 고통 그 자체만 남게 됩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라 생각한 순간, 관객은 그 이상의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비닐하우스가 말하는 무엇’. 무엇이 이 고통의 실체일 듯합니다.
 
영화 '비닐하우스' 스틸. 사진= ㈜트리플픽쳐스
 
일단 비닐하우스, 위태롭습니다. 모든 것에 취약합니다. 아슬아슬합니다. 비닐하우스는 곧 문정입니다. 오프닝에 등장한 그의 자해와 폭력의 극단성. 문정의 시선에선 지극히 일반화된 행동으로 다가옵니다. 그 모습을 통해 비닐하우스의 불투명함 속 감춰진 불안함과 날 선 외침이 들리는 듯합니다.
 
영화 '비닐하우스' 스틸. 사진= ㈜트리플픽쳐스
 
비닐하우스는 흐릿하지만 밖에서 안, 그리고 안에서 밖이 보이지 않습니다. 불투명한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의 상징성은 비닐하우스와 그 안에 사는 문정을 통해 대변되는 우리 모두의 삶을 말하는 듯합니다. 물론 이 영화 속 불투명성과 불확실성 그 자체가 너무도 극단적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최선이 아닌 최악의 상황 속에서 희망의 역설을 얘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작용과 반작용 그리고 관계가 만들어 낸 인과의 문제가 행위자의 본성과 어떤 연관을 지을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일종의 거짓말이 나쁜것과 좋은것으로 나눠볼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일 수 있습니다. ‘거짓그 자체가 진실이 아님을 전제로 하는데 그 속에서 일종의 선과 악을 구분 지어야 한다는 아이러니, 즉 역설의 문제가 도출되는 것입니다.
 
영화 '비닐하우스' 스틸. 사진= ㈜트리플픽쳐스
 
비닐하우스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가 사회적 시선으로 말하는 약자들입니다. 반대로 그들은 모두가 사회적 시선으로서 가해자이기도 합니다. 약자의 굴레 속에서 가해의 죄악을 뒤집어 쓸 수 밖에 없는 인과의 오류. ‘비닐하우스는 어쩌면 우리 사회가 가장 드러내기 싫은 치부 그 자체의 모순적 민 낯일 수도 있을 듯합니다. 민 낯을 봐 버린 이 영화의 시선이 바라볼 다음은 어디일까요. 영화 마지막 문정의 표정과 시선의 짓눌림’. 그게 우리 모두가 느껴야 할 부채(負債)의 무게일 것입니다. 개봉은 오는 26.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김재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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