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고현정입니다. 배우 고현정입니다. 맞습니다. 그 배우, 그 고현정입니다. 더 이상 어떤 설명이 필요할까 싶습니다. 모두가 동의를 하는 부분입니다. 100% 그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고현정’이라는 이름 석자. 그 이상이 필요할까 싶은 생각뿐입니다. 그래서 ‘고현정’이란 이름 석자에 담긴 힘이 작품에 힘을 불어 넣어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아주 약간만, 아주 미묘하게 약간만 틀어서 생각해 보면 고현정이 지금까지 받아 온 스트레스의 크기가 가늠이 될 듯도 합니다. 그는 이런 표현에 대해 사실 가히 긍정적인 반응을 하진 않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배우의 세계에서 자신의 위치, 분명히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위치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넘어 작품 자체를 옥죄는 ‘무엇’으로 느껴가는 듯싶었습니다. 듣는 자세에 따라선 분명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지만, 그 대상이 ‘고현정’이라면 애기는 달라집니다. 그는 존재감 하나로 ‘배우’라는 단어에 가장 적합한 국내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거기에 연기력까지 그 존재감을 충분히 뒷받침하고도 남을 정도입니다. 그런 그가 작품을 대하는 태도를 넘어 느끼는 중압감. 분명 엄청났을 겁니다. 모두가 자신만 바라보고 모두가 자신의 숨소리 하나에도 귀를 기울이는 모습. 그래서 고현정이란 이름의 무게감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마스크걸’의 ‘김모미’ 제안이 배우 인생 새로운 결을 보게 해 준 행복이란 말. 고현정의 진심처럼 느껴졌습니다.
배우 고현정. 사진=넷플릭스
1989년 제33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선으로 연예계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올해로 데뷔 34년차. 드라마 영화 다큐멘터리 등 수 많은 작품을 섭렵하며 필모그래피를 쌓아왔습니다. 이 가운데 OTT작품은 이번 ‘마스크걸’이 처음입니다. ‘코로나19’ 이후 국내에 안착된 OTT플랫폼, 배우로서가 아닌 시청자로서 우선 어색한 포맷이 아니랍니다. 배우로서도 그저 또 다른 작품으로 참여하는 기분이었지만 인터뷰 며칠 전 공개된 작품의 전 세계 반응만큼은 신기하고 또 묘한 느낌이랍니다.
“전 그저 퍼즐 한 조각으로 참여한 것뿐인데, 제가 주인공처럼 비춰지는 게 너무 죄송해요. 일단 주변에서 연락도 많이 주시고 반응도 좋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싶었는데 해외에서도 인기가 높다고 해서 ‘왜?’라고 했었죠. 해외에서도 공감이 되는 정서란 게 신기하면서도 글로벌 전체의 관심이 사실 처음이라 ‘얼떨떨’하고 묘해요. 이게 뭐지 싶은 걸 저도 느끼게 되네요. 하하하. 촬영할때 현장이 기분이 좋고 그러면 결과도 비슷한 느낌이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평가를 받나 싶기도 해요.”
배우 고현정. 사진=넷플릭스
‘마스크걸’은 작품 자체의 설정과 진행 등이 너무도 파격적입니다. 동명의 웹툰이 원작인 ‘마스크걸’은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한 내용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여러 사건들, 특히 살인과 복수 여성 연대 교도소 탈옥 등. 설정 하나하나가 웬만큼 센 드라마나 영화의 분위기를 넘어설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런 설명에 대해 고현정은 반대로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난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말해 귀를 기울이게 했습니다.
“제가 좀 의아했던 건 다들 ‘충격적’이라고 하시는 거에요. 전 오히려 전체적으로 무리를 하지 않는 무난한 느낌이었거든요. 전 원작을 안 봤고, 감독님이 대본까지 쓰셨는데 충분히 선을 넘을 수 있는 걸 그렇게 안하신 게 느껴졌어요. 특히 마지막 엔딩이 마음에 들었어요. 사실 무엇보다 제가 이 얘기가 마음에 들고 작품이 좋았던 건, 이런 장르물이 저한테 제안이 왔단 게 너무 행복했어요. 전 거의 모든 작품이 저 혼자 끌고 가는 것뿐이었는데, 이번에는 저 포함해서 3명이 1명을 연기하는 거더라고요. 되게 특이했고, 나도 도움을 받을 수 있겠구나 싶었죠.”
배우 고현정. 사진=넷플릭스
고현정의 말처럼 ‘마스크걸’의 가장 특이한 부분은 3인 1역이었습니다. 주인공 ‘김모미’를 A-B-C로 나눈다면 고현정은 맨 마지막의 C였습니다. 김모미A를 연기한 신인 ‘이한별’, 그리고 김모미B를 연기한 걸그룹 애프터스쿨 출신의 ‘나나’. 이한별이 소극적이고 파릇하며 또 다듬어 지지 않은 김모미를 연기했다면, 나나는 격렬하고 화려하고 또 사라지기 직전의 가장 만개한 꽃 같은 느낌의 김모미를 그렸습니다. 고현정의 김모미는 고요하게 흐르는 깊은 강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고현은 앞선 두 명의 후배가 연기한 김모미의 느낌과 감정을 이어 받아야 했습니다.
“3인 1역에 감정까지 이어 받아야 하는데, 어렵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는데 전혀 안 그랬어요. 어떤 분들 보면 과거 사진을 보면 전혀 다르게 생긴 분들 있잖아요. 그죠? 지금 기자님만 해도 초등학교 때 모습과 지금 모습 비교해 보면 전혀 다를 걸요(웃음). 더욱이 ‘마스크걸’은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이잖아요. 그냥 세 명의 김모미가 한 사람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두 후배도 저도 그렇게 접근했어요. 전혀 고민할 부분은 아니었어요.”
배우 고현정. 사진=넷플릭스
고현정의 김모미는 극중 교도소에 수감된 이후의 삶부터 입니다. 가장 고단하고 힘들고 우울하며 괴로운 시간을 보내는 김모미의 삶을 고현정은 담당했습니다. 하지만 이 마저도 고현정은 전혀 다르게 해석을 했습니다. 극중 고현정의 김모미는 10년의 시간을 수감 생활로 보낸 뒤의 모습에서 등장합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고요하게 흐르는 깊은 강물처럼 존재합니다. 그 시간을 고현정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전 모미가 교도소에서 힐링하는 중이라고 생각했어요. 정해진 장소에서 사람이 10년 이상의 시간을 보내면 어떤 삶의 패턴이 생기면서 루틴도 만들어지고. 근데 자유가 박탈된 교도소이니 더 확실해지는 거죠. 근데 그게 모미한테는 힐링이었을 것 같아요. 태어나서 교도소에 들어오기 전까지 모미는 매번 뭘 하잖아요.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근데 교도소에선 정말 아무것도 안해도 되잖아요. 그저 멈춰 있는. 그런 사람의 감정, 텐션. 어땠을까. 상상해 봤죠. 힐링이란 단어 외에는 생각이 안나더라고요.”
배우 고현정. 사진=넷플릭스
스포일러이지만 이미 이 내용으로 온라인에선 논쟁이 벌어질 정도입니다. 극중 모미의 딸 미모(신예서)가 주오남(안재홍)의 아이 즉 김경자(염혜란)의 손녀인가 아닌가에 대한 지점입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김모미는 김경자에게 자신의 딸 미모가 김경자의 아들 주오남의 딸이란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을까. 왜 말을 하지 않았을까. 그런 의문도 남게 됩니다. 고현정은 아주 간단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고민이 없었습니다.
“그걸 말할 이유가 없죠. 모미는 주오남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저도 생각을 해봤는데, ‘왜 그걸 말해야 하지’란 게 제 결론이었어요. 사실 미모가 주오남의 아이인지도 모르잖아요. 모미가 술집에서 일하면서 문란 했을 수도 있고. 저한테 가장 확실한 건, 미모는 내 딸이고, 김경자가 내 딸을 죽이려 한다. 이것뿐이었어요. 그것 외에는 저한테, 그리고 모미한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 같아요.”
배우 고현정. 사진=넷플릭스
그럼 고현정과의 대화에서 결론은 이렇게 흘러가야 할 듯 했습니다. 고현정이 연기한 ‘마스크걸’ 속 김모미, 과연 악인일까. 아니면 악인이 아닌 또 다른 결을 가진 인물일까. 분명한 것은 살인을 했기에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냥 나쁜 악인이라고 할 수도 없었기에 그런 의문이 남게 됐습니다. 김모미는 어린 시절부터 잘못된 모성을 통해 키워진 이른바 만들어진 괴물의 또 다른 형태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지점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한데, 제 의견을 말씀 드리면 모미는 너무 안타까운 친구에요. 어린 시절부터 못생겼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엄마에게 비난을 받으면서 컸어요. 그런 친구의 감정이 어떻게 생성되고 자랐을까 싶은 거죠. 아무리 비난을 받고 상처를 받아도 가족들이 그 아픔을 채워줘야 하는데. 그런 상실감 속에서 자라다 보니 매번 선택을 할 때마다 ‘최악의 선택’만 하잖아요.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춤을 추고 노래를 할 때 박수를 받고 싶었던 것뿐인데. 가여워요.”
배우 고현정. 사진=넷플릭스
‘미스코리아’로 데뷔했고 ‘아름다움의 아이콘’처럼 배우 생활을 30년을 이어온 고현정입니다. 그런 그가 못생긴 외모로 인해 평생을 잘못된 선택만 해 온 김모미를 연기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처럼 다가왔습니다. 이런 설명에 고현정은 파안대소를 하면서도 손사래를 쳤습니다. 자신이야 말로 김모미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적임자였다고 평가했습니다. 자화자찬이 아니었습니다.
“팩트를 말씀드릴께요. 전 1등을 해 본 적이 없어요(웃음). 미스코리아도 2등이었어요. 하하하. 솔직히 외모 덕 봤어요. 근데 저보다 더 예쁜 분들에게 치여 보기도 했고 캐스팅에서 밀려 본 적도 있어요. 한때는 이 주체 못할 덩치와 살 때문에 지적 받은 적도 되게 많아요. 다 아시잖아요(웃음). ‘모래시계’ ‘대물’ 등 그저 제가 출연한 작품에서 주인공처럼 비춰진 것뿐이죠. ‘선덕여왕’때도 제가 주인공이 아니었잖아요. 하하하. 저처럼 2등 콤플렉스에 시달려 본 사람 없을 걸요. 김모미의 심정, 너무도 이해되는 사람이 바로 저 고현정입니다. 하하하.”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