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전혀 아닐 것이다’란 선입견. 물론 이 문장, 영화를 보기 전 감정적 표현의 한계였습니다. 일단 느와르입니다. 남자가 느껴져야 합니다. 그리고 어둡고 터프해야 합니다. 마초적 느낌도 강하게 다가와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느와르’ 장르 안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아우라 혹은 미장센의 텍스트적 표현입니다. 하지만 이 표현, 명확하게 갇힌 명제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정답은 아니란 얘기입니다. 더 쉽게 표현하자면 말을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누군가의 생각 그리고 입을 통해 시작된 표현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배우 송중기는 그걸 깨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라고 해도 결과적으로 송중기는 그 확고해 보이던 명제에 준하던 이 표현의 완벽하게 붕괴시켰습니다. 송중기가 느와르안에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란 상상. 우린 이걸 ‘가짜’ 혹은 ‘잘못된 무엇’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영화 ‘화란’에서 완벽하게 부서졌습니다.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부서졌습니다. ‘송중기’란 배우가 만들어 낸 ‘치건’이란 인물을 통해 ‘화란’은 희망과 절망 속 양가적 감정의 질량을 온전히 만들어 내면서 ‘느와르’의 진짜 얼굴을 들춰냈습니다. 다시 말해 ‘화란’은 우리가 알고 있던, 그리고 우리가 확신해 왔던 ‘느와르’의 강렬함 그 자체의 결을 재정립시켜 버렸습니다. 그 결과물의 가장 큰 동력을 송중기가 끌어 올렸습니다. ‘화란’ 속 송중기와 ‘송중기’ 속 화란의 양가적 감정의 질량이 온전히 교차하는 하나의 점. 그 점이 바로 송중기란 배우의 존재감으로 재창조됐습니다. 송중기는 이제 그런 배우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 배우가 만들어 낸 ‘화란’은 진짜 느와르의 얼굴을 들춰냈습니다.
배우 송중기. 사진=하이지음스튜디오
여러 채널을 통해 이미 공개가 된 팩트 하나. 송중기는 ‘화란’에 노 개런티로 출연을 했습니다. 돈을 받지 않고 출연을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화란’도 처음부터 송중기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연이 되려면 이렇게도 되는가 봅니다. 송중기는 우연히, 정말 우연히 ‘화란’의 시나리오를 손에 넣게 됐습니다. 읽어본 시나리오의 느낌은 그동안 송중기가 그렇게도 만나보고 싶었던 ‘새로움’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사실 제안 받았던 어떤 영화를 거절하려고 관계자 분을 만나러 나간 자리였어요. 그렇게 그 분과 얘기를 하면서 제안 받은 작품을 거절했죠. 그때 얘기가 오가면서 자연스럽게 ‘어떤 작품을 하고 싶냐’ ‘어떤 인물을 연기하고 싶냐’라는 대화가 오갔고. 그때 ‘화란’ 시나리오를 전달 받았어요. 읽었는데 느낌이 꼭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를 봤는 때의 감정 그 이상이었죠. 너무 하고 싶었고 놓치면 안될 듯했어요.”
배우 송중기. 사진=하이지음스튜디오
송중기가 ‘출연을 하고 싶다’ 먼저 제안을 했답니다. 제작진 쪽에서도 발빠르게 진행이 이뤄졌답니다. 하지만 송중기가 출연을 결정하고 고민이 되기 시작했답니다. 본인이 먼저 러브콜을 보냈으면 고민을 했다는 게 앞뒤가 맞지 않았습니다. 일단 내용자체가 워낙 어두웠습니다. 수익성 측면에서 이 영화는 전혀 결 자체가 달랐습니다. 두 번째는 연출을 맡은 감독이었습니다. 데뷔 신인 감독인데 이렇게 어두운 얘기를 하겠단 점이 고민이 됐답니다.
“제가 노 개런티로 출연을 결정했는데 소속사 대표님이 오케이를 하실까. 그게 첫 번째 걱정이었죠. 근데 너무 감사하게도 허락해 주셨어요. 두 번째는 감독님이 너무 궁금했어요. 도대체 어릴 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얘기를 쓰셨을까 싶었죠. 실제로 가정 폭력을 당했던 경험이 있으신가 싶으셨죠. 나중에 만나 뵈었는데 너무도 밝고 어릴 때도 너무 행복한 가정에서 사랑 받고 자라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솔직히 그래서 더 놀라웠죠. 하하하.“
배우 송중기. 사진=하이지음스튜디오
‘화란’은 느와르 그리고 조직폭력배 두 개의 코드가 등장합니다. 이 두 가지는 국내에선 흔하다 흔한 ‘조폭 영화’로 치부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완성된 결과물 자체는 전혀 다른 결의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일단 송중기가 연기한 ‘치건’, 조직의 중간보스이지만 굉장히 복잡하고 또 다층적인 내면을 소유한 인물입니다. 그는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치건’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이미지를 떠올렸고, 그 이미지를 기반으로 인물을 만들어 나갔답니다.
“’느와르’가 국내에선 조폭영화로 불리는 경우가 너무 많았었기에 ‘송중기가 조폭 영화를 하고 싶었구나’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화란’을 ‘조폭 얘기’로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전 이 얘기를 읽으면서 ‘치건’이 찌에 걸린 물고기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죠. 큰 형님(김종수)이 던진 낚시대에 걸린 물고기. 그게 치건 같았어요. 그래서 치건이 자신의 경험을 남의 얘기처럼 하는 저수지 장면도 사실 오토바이 정비소안에서 나누던 장면인데 감독님께 유일하게 부탁드려 장소를 바꾼 거에요.”
배우 송중기. 사진=하이지음스튜디오
‘화란’은 송중기가 연기한 ‘치건’ 그리고 신예 홍사빈이 연기한 ‘연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얘기이기도 합니다. 치건은 그런 의미에서 연규에게 거의 유일한 ‘어른 사람’으로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연규를 무너트리고 위험에 빠트리게 하는 인물이기도 하며 또한 연규를 구원하고 도와주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런 연규에게 치건은 동질감 연민 다양한 방식과 결의 감정을 느꼈을 겁니다. 이런 그들의 시작, 처음에는 치건이 거절하고 거부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묘하게 감정적으로 이율배반적인 시작이기도 합니다.
“해석의 여지가 많을 수 있는데, 치건의 입장으로 보자면 ‘오지 말라’고 했던 건 사실 ‘왔으면 했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연규를 망가트리려고 했을 거에요. 자신과 비슷한 결, 그쪽 세계의 인물이라고 봤겠죠. 그런데 얼굴의 상처를 본 뒤 그 얼굴에서 자신을 봤던 거 같아요. 얼굴을 보면서 치건을 하는 말, 그 말이 두 사람 관계의 시작과도 같은 지점이잖아요. 사실 지금 저도 헷갈리기는 해요. 찾아오길 바랐던 것인지 아니면 진짜 오지 말길 바랐던 것인지.”
배우 송중기. 사진=하이지음스튜디오
그런 지점은 영화 하이라이트 장면에서도 여지 없이 등장합니다. 치건과 연규의 격렬한 액션이 등장하는 영화 후반부의 장면. 이 장면은 치건과 연규 두 사람이 최후의 마지막을 위해 대결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생과 사를 거는 결투의 장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서로가 서로를 구하기 위해 다툼을 벌이는 기묘한 장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치건이 선택했는지 연규가 선택했는지, 치건이 결정한 것인지 연규가 결정한 것인지. 불분명한 묘한 마지막이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그 장면은 김창훈 감독님이 연출하신 게 아니라 허명행 무술 감독님이 연출을 하신 거에요. 굉장히 하드했던 장면인데, 김창훈 감독님도 그랬고, 허명행 감독님도 그랬고. 정확하게 누가 선택하고 누가 결정한 것인지 모르게 만드는 게 핵심이었어요. 그래서 멋들어진 액션도 아니고 감정이 뒤섞인 막싸움의 액션도 아니고. 진짜 두 사람의 깊은 고통과 아픔이 뒤섞인 액션이 나오는 쪽으로 디자인이 됐던 것 같아요. 이게 도대체 말리는 건지 때리는 건지. 살리려고 하는건지 죽이려고 하는건지. 딱 그 지점을 정확하게 관통하는 방식으로 디자인 했었어요.”
배우 송중기. 사진=하이지음스튜디오
‘화란’의 송중기가 가장 화제가 된 지점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노 개런티 출연이었습니다. 송중기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그 지점이 부각되는 게 너무 부담이라고 합니다. 작품에 대한 애정으로 결정한 부분이 오히려 작품의 완성도를 덮어 버리는 것처럼 비춰져 언급되는 것조차 너무 부담스럽다고 손사래를 쳤습니다. 그저 ‘화란’에 대한 애정으로 해석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정말 해보고 싶었던 장르와 인물에 대한 연기 갈증을 위해 결정한 부분이에요. ‘화란 제작사에서 만든 ‘무뢰한’을 너무 좋아했는데, 그 제작사가 만드는 영화란 점이 너무 끌려서 제가 반대로 러브콜을 보내 화답해 주셨으니 저도 뭔가 도움이 되는 결정을 하려고 했던 것뿐이에요. ‘돈 받은 만큼 일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는데, 전 돈을 안받았지만 더 열심히 한 것 같은 느낌이에요(웃음).”
배우 송중기. 사진=하이지음스튜디오
송중기와의 대화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게 최근 결혼한 아내 그리고 태어난 아이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아이 얘기를 꺼내자 그는 핸드폰에 있는 아이 사진을 보여 주며 흐뭇한 아빠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는 아내에 대해 ‘업계의 고충을 털어 넣고 함께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최고의 동료’라고 소개했습니다. 아빠로서의 마음 가짐도 분명 달라졌다고 전했습니다.
“아내도 배우를 했었고 그래서 고민을 함께 나누고 조언도 듣지만 적극적으로 제가 오픈하고 조언을 구하지는 않아요. 이번에 칸에 갈 때도 제가 들떠 있는 걸 보고 ‘너무 까불지 말고 잘하고 와라’라고 조언해 주더라고요. 참고로 아내는 저보다 먼저 칸 레드카펫에 서 본 경험이 있어요. 아빠가 되기 전에도 도전을 하는 성격이었는데, 이젠 좀 더 적극적으로 많은 작품을 통해 좋은 배우가 되고 싶은 마음이 커졌어요.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되자. 뭐 그런 거창한 목표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중에 아이에게 좋은 작품을 남긴 배우로서 남고 싶은 마음은 들게 되는 것 같아요.”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