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설경구, 이 세 글자만으로도 여전히 그는 ‘믿고 볼 수 있는’ 힘을 주는 배우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단 1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무엇으로 설경구를 설명해야 그가 가진 ‘진짜’를 조금이나마 더 알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설경구,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믿음’이 갑니다. 그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설득이 됩니다. 당연합니다. 연기력에 있어서 대한민국 몇 손가락 안에 꼽아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재미입니다. 그가 출연한 영화, 거의 모두가 재미가 있습니다. 감동을 주는 작품이든, 단순하게 재미만을 추구한 작품이든. 그것도 아니면 어떤 확고한 메시지가 담긴 작품이라도. 그가 출연하면 재미가 있습니다. 그건 작품에만 해당하는 게 아닙니다. 설경구 본인도 재미를 느끼며 연기를 하는 듯합니다.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의 배우적 감정부터 캐릭터적 감정까지 모두 관객들에게 전달되는 듯합니다. 이걸 우린 몰입감 또는 일치감이라고 합니다. 이 과정의 힘, 대한민국에서 아마 설경구가 넘버원일 듯합니다. 세 번째는 지독함입니다. 설경구가 연기를 대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자세. 정말 지독합니다. 그는 작품을 위해 몸무게를 늘렸다 줄였다를 손바닥 뒤집듯이 합니다. 이런 그의 몸 만들기, 충무로에선 유명합니다. 신체를 이 정도로 컨트롤하니 감정적 컨트롤은 더 할 것입니다. 그가 출연해 왔던 이른바 무거운 작품들, 웬만한 배우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작품들 일색입니다. 그런 설경구가 정말 오랜만에, 아니 데뷔 이후 아마 처음으로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고 임한 듯합니다. 제대로 악에 받쳐 출연한 듯합니다. 정지영 감독이 울분에 차 연출을 결심한 영화 ‘소년들’. 그 속에서 설경구는 정지영 감독의 그 울분을 대변했습니다. 그 울분은 세상이 느끼고 토해내는 분노이기도 합니다.
배우 설경구. 사진=CJ ENM
설경구는 지금까지 영화 작업을 하면서 실화를 모티브로 제작된 작품을 꽤 많이 경험했습니다. 실화를 배경으로 한 작품, 베테랑 배우들도 사실 상당히 꺼려하는 작업 중에 하나입니다. 분명하게 존재하는 사실이 있고, 그 사실 속 실제 인물들이 존재하고 있기에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처럼 연기를 해야 하는 배우 입장에선 분명 엄청난 부담입니다. ‘소년들’은 1999년 실제로 있었던 ‘삼례 나라 슈퍼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합니다. 연출은 거장으로 불리는 정지영 감독이 맡았습니다.
“일단 실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쓴 감독님들 시나리오는 거절을 못해요(웃음). 이미 분노에 이글거리면서 시나리오를 쓰고 출연 제안을 하러 오셨는데 그 앞에서 ‘못하겠다’란 말을 못해요. 하하하. 아마 기자님도 그 상황이면 절대 거절 못하실 거에요(웃음). 정지영 감독님은 사석에서 몇 번 뵌 적이 있었는데, ‘강철중 같은 역할로 한 번 같이 하자’라고 하시고, 딱 일주일 뒤 ‘고발’이란 가제의 시나리오를 주셨어요. 그게 ‘소년들’이 된 거에요. 첫 제안 당시 감독님 눈을 못 피하겠더라고요. 하하하.”
배우 설경구. 사진=CJ ENM
‘소년들’에서 설경구가 맡은 ‘황준철’ 반장. 이 캐릭터 역시 실제 인물이 모티브입니다. 다만 ‘소년들’의 모티브가 된 ‘삼례 나라 슈퍼 살인 사건’ 속 인물이 아닌 동일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오해를 하는 ‘약촌 오거리 살인 사건’을 담당했던 실제 형사를 모티브로 했답니다. 서사적인 부분은 ‘나라 슈퍼 사건’을 배경으로 하지만 인물적인 부분은 ‘약촌 오거리 살인 사건’에서 끌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설경구는 ‘이 영화는 실화이면서도 실화가 아니다’고 전했습니다.
“극 자체에 몰입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실화를 배경으로 만들었지만 이런 일은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만이 있는 게 아니거든요. 당장 제가 연기한 황반장 캐릭터만 해도 다른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님이고. 극중에서 제가 2000년과 2016년을 오가면서 연기를 했는데, 2016년의 모습이 진짜 중요하게 와 닿더라고요. 몸과 마음이 모두 피폐해져 있고, 술에 의존하는. 혈기 왕성하던 젊은 시절과 달리 많은 차이가 있던 그 모습이 와 닿았어요. 실제 모델인 형사님이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뇌경색까지 앓으셨다고 하더라고요.”
배우 설경구. 사진=CJ ENM
그가 ‘소년들’ 출연을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당연히 정지영 감독이었을 겁니다. 설경구가 크게 부인하지 못했습니다. 정지영 감독은 연출 데뷔 40년을 맞이하는 충무로 원로이자 현역 최고의 거장으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는 대가입니다. 특히 정지영 감독은 다양한 사회 문제 그리고 영화인들의 권익 문제 나아가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인권 문제에 누구보다 앞장서고 목소리를 내는 ‘사회파 연출자’로서 널리 알려진 감독이기도 합니다. 그의 눈에 비친 정지영 감독은 이랬습니다.
“그냥 딱 뵈면 되게 깐깐하고 꼰대 같으실 것 같잖아요(웃음). 그리고 연세가 많으시고. 그냥 옛날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그런 선입견이 이번 작품을 통해 산산이 부셔졌어요. 감독으로 40년이지 연출부 생활까지 하면 영화 현장에서만 50년이 넘게 계신 분이잖아요. 굉장히 고압적이고 꽉 막혔고 그럴 줄 알았는데. 그냥 이 분은 위 아래가 없으세요. 그냥 다 수평이세요. 너무 놀라울 정도로 수평이세요. 한 번은 굉장히 어린 조감독하고 막 뭐라 얘기를 하시는데, 전 깜짝 놀라서 싸움 난 줄 알았는데. 뭔가 의견이 안 맞아서 실제로 좀 격하게 토론을 하신 거더라고요. 하하하. 전 감독님보다 더 오픈 마인드인 분을 뵌 적이 없는 거 같아요.”
배우 설경구. 사진=CJ ENM
‘소년들’, 이미 재심을 통해 당시 진범으로 잡혀 옥고를 치른 3인은 모두 무죄를 받아냈습니다. 당시 강압 수사에 따른 거짓 자백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설경구는 실제 사건이 일어난 전주 시사회에서 묘한 경험을 했었다고 전했습니다. 지역 시사회에 참석했던 그는 영화 상영이 끝난 뒤 실제 사건의 당사자분들과 직접 만났답니다. 무엇보다 기분이 너무 이상했던 것은 극중에서도 등장하는 사건의 실제 진범과 마주한 경험이었답니다.
“전주 시사회에선 촬영에 도움을 주신 분들과 피해자 유가족들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의 피의자로 누명을 쓰셨던 분, 낙동강 살인 사건의 피의자로 누명을 쓰셨던 분 등이 오셨어요. ‘소년들’의 실제 피해자 3분 중 한 분도 오셨죠. 제가 맡은 황준철의 실제 모델인 형사님 그리고 이 사건의 실제 재심을 맡으셨던 박준영 변호사님도 오셨죠. 진짜 이상했던 건 이 사건의 진범을 실제로 만나 인사한 거에요. 더 이상한 건 그 진범하고 유가족분들이 연락하고 지낸대요. 정말 기분 이상했죠. 뭔가 제 상상을 넘어선 초월하신 분들 같았어요.”
배우 설경구. 사진=CJ ENM
설경구, 데뷔 30년차에 접어든 중견 이상의 위치에 섰습니다. 한때 그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출연작은 무조건 본다는 신뢰의 상징이자 흥행 보증 수표의 대명사처럼 불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 그리고 확실하게 그 힘이 떨어진 것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더 뚜렷해지고 더 확실해 졌습니다. ‘지천명 아이돌’이라 불리며 제2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설경구에게 현장은 고맙고 또 감사한 공간이면서 또 선물 같은 존재랍니다.
“정지영 감독님이 출연한 다큐를 제가 본 적이 있는데, ‘박하사탕’ 현장에 오셨다가 절 보셨는데 그렇게 싸가지가 없었다고 말씀하신 걸 봤어요. 그땐 제가 내 역할 외에는 주변을 볼 여유가 전혀 없었어요. 근데 이번에 ‘소년들’ 작업하면서 ‘죄송하다’고 말씀 드렸어요. 이제 이 나이 정도가 되니 현장에서 전체가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냥 현장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또 감사해요. 한국영화가 너무 힘들고 어려운 시기인데, 그럼에도 영화는 계속 상영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라도 한국영화 파이팅입니다.”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