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한해 2억명, 국내 시장 규모 1조 8000억원대. 국내 영화 시장 규모였습니다. 세계 3대 영화제 주요 수상은 물론 전 세계 영화 시장 꼭대기로 불리는 할리우드에서도 실질적 흥행 IP(지식재산권) 창고로 주목하는 곳이 K영화 시장입니다. 이미 세계 최대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는 K영화 시장을 가장 중요한 콘텐츠 보급 기지로 여깁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국내 영화 시장은 2020년 초 ‘코로나19 펜데믹’ 이후 극단적 침체기를 걷는 중입니다. 분위기 전환을 위한 특별 전략이 필요한 때지만 국내 영화 시장을 좌지우지했던 ‘콘텐츠 공룡’
CJ ENM(035760)은 잇따른 부진 속에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CJ ENM 그늘에 가려져 있던 경쟁 배급사들은 똑똑한 전략으로 시장 흥행을 주도하며 넘버원 자리를 넘보기 시작했습니다.
‘공룡의 부진’···K영화 시장 ‘직격탄’
작년 한 해 국내 영화 시장에서 CJ ENM의 부진은 가히 충격적인 수준이었습니다. 시장 전체를 이끌고 방향성과 흐름을 주도하던 ‘리딩히터’ 회사로서의 입지를 지켜오던 CJ ENM에게 2023년은 ‘이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던’ 한 해였습니다. 한 해 동안 500억원 이상의 투자 손해를 기록했습니다.
‘유령’ ‘카운트’ ‘소년들’이 손익분기점은 고사하고 관객 100만명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추정 제작비만 280억원을 쏟아 부은 대작 ‘더 문’은 손익분기점 10분의1에도 못 미치는 51만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이런 부진과 침체로 인해 한때 영화계에선 “CJ ENM이 영화 사업에서 손을 뗀다”는 루머까지 나왔습니다.
2024년 출발도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올해 첫 스타트를 끊은 ‘외계+인’ 2부 역시 142만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쳤습니다. 이달 개봉한 ‘도그데이즈’도 손익분기점에 한참 모자란 36만명을 동원 중입니다. 하반기 기대작으로 꼽히는 ‘베테랑2’와 ‘하얼빈’이 개봉 시기는 여전히 유동적입니다.
CJ ENM의 부진은 ‘코로나19’로 인한 자체 빅데이터 붕괴로부터 출발합니다. ‘코로나19’ 이후 극장 영업시간 제한과 거리두기 및 취식 금지로 상영업 시장 붕괴가 촉발됐습니다. 하지만 2022년 4월 각종 제한이 해제되면서 CJ ENM은 ‘헤어질 결심’을 야심차게 내놨습니다. 당시 ‘칸 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 프리미엄을 예상했던 CJ ENM 내부에선 ‘헤어질 결심’이 3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관객수 190만에 그치며 20년 가까이 시장을 선도해 온 CJ ENM 내부 시장 분석 지표가 깨졌습니다. 영화계 관계자는 “’헤어질 결심’의 흥행 예상이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기억한다”면서 “이 예상이 깨지면서 다른 투자 배급사에서도 분석 지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습니다.
CJ ENM의 경영 라인 변화도 리스크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2022년 말 구창근 현 CJ ENM 대표가 새로 취임했는데, 구 대표는 애널리스트 출신의 지배구조개편 전문가입니다. 숫자 전문가가 ‘내용(콘텐츠)’으로 실적을 내는 회사를 이끌면서 생산 콘텐츠 질적 수준에 의문 부호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한 업계 관계자는 “CJ ENM이 영화 시장 큰 손으로서 시장을 이끌어 가는 것에서 뭔가 멀어지는 느낌이 든다”면서 “국내 영화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진 이유도 있지만 그 리스크를 CJ ENM이 상쇄시킬 능력이 사라진 듯하다”고 꼬집었습니다.
장르 깊이…다변화 연구 필요
CJ ENM의 부진은 다른 투자배급사와 비교했을 때 더 뚜렷한 명암을 드러냅니다. CJ ENM 그늘 속에 만년 2인자로만 머물던 롯데컬처웍스는 작년 ‘약진’이란 무엇인가를 결과로 보여줬고,
쇼박스(086980)도 시장 흐름을 읽는 민첩함으로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작년 롯데컬처웍스는 ‘작고 단단한 장르 영화’로 재미를 봤습니다. 고 이선균 정유미 주연 영화 ‘잠’입니다. ‘잠’은 146만 관객을 동원하며 손익분기점을 넘어섰고, 수익 면에서도 짭짤했습니다. ‘잠’은 규모와 스타성에 기대지 않은 채 장르 속에서 풀어낼 수 있는 확장성 높은 콘텐츠로 관객들에게 강렬한 흡인력을 선사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한 제작사 대표는 “제작사들 입장에서도 ‘규모의 경제학’, 즉 대작으로 영화 시장을 풀어야 한다는 시각은 끝났다고 본다”면서 “작지만 탄탄한 얘기를 통해 풀어가는 집중적인 얘기를 만드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쇼박스는 기존 배급 방정식을 벗어나 시장 흐름을 읽고 개봉 시기를 정하는 유연한 전략으로 영화 시장 흥행을 주도 중입니다. 지난 22일 개봉한 쇼박스 투자 배급 영화 ‘파묘’는 총 제작비가 140억원대에 이르는 대작으로, 성수기 시즌 개봉이 어울리는 체급의 영화입니다. 하지만 쇼박스는 2월 비수기 시즌 개봉을 강행했고 단 4일 만에 200만 관객을 끌어 모았습니다. 쇼박스 측은 “관람 타깃인 2030세대의 관람 소비 패턴을 고려했을 때 2월 말이 적절했다”고 말했습니다. 비수기와 성수기 경계가 무너진 국내 영화 시장 흐름 패턴을 읽고 과감히 승부수를 던진 결과입니다.
CJ ENM의 ‘부진’ 그리고 롯데컬처웍스의 ‘선택과 집중’ 여기에 쇼박스의 ‘유연한 배급 전략’은 국내 영화 시장 투자 배급사들에게 어떤 고민이 필요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불어 투자 배급 빅데이터가 원점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합니다.
한편 이외에
NEW(160550)와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가 각각 올 여름 ‘엑시던트’와 ‘범죄도시4’를 개봉할 예정입니다. 앞선 세 회사의 선례를 보고 똑똑한 투자 배급 전략을 세워 침체된 국내 영화 시장에 새로운 활기가 돌 수 있길 기대해 봅니다.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