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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바위그림)백해의 선사예술가, 비그강 바위에 삶을 새기다
(백야의 땅, 박성현의 바위그림 시간여행-⑭)
입력 : 2024-03-04 오전 6:00:00
 
북극 아래에 위치한 페노스칸디아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핀란드, 러시아의 콜라반도와 카렐리아 지역을 가리킵니다. 세계 곳곳에서 선사 인류의 바위그림이 발견된 것처럼, 이곳에도 수천 년 전 신석기인들이 남긴 바위그림이 있습니다. 그들은 물가의 돌에 무엇을, 왜, 새겼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질문을 품은 채 떠난 여정, 러시아 카렐리야의 오네가호수와 비그강, 콜라반도의 카노제로호수에 새겨진 바위그림과 노르웨이 알타 암각화를 향해 가는 시간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잘라브루가의 여름 풍경. 2023년 7월. 사진=박성현
 
일상 - 선사시대의 ‘죄와 벌’
 
전에 언급한 것처럼, 202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명칭은 ‘오네가호수와 백해의 암각화’다. 그런데 이때 ‘백해 암각화’는 정확히 말해 백해로 합류하는 비그강 하구에 위치한 암각화군을 가리킨다. 사실 백해는 넓은 영역이어서 나중에 방문하게 될 세 번째 암각화 지점인 카노제로호수도 백해 근처에 있다. 비그강 하류 여러 섬에 산재한 암각화군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잘라브루가에는 이곳에 살았던 신석기인들의 일상이 다채롭게 담겨 있다. 이미 살펴본 구잘라브루가 사슴들의 열을 지은 계절이동과 두 부족 사이의 충돌, 신잘라브루가 그룹 4의 스키 탄 사람들의 엘크사냥과 배를 탄 사람들의 고래사냥 외에도 인상적인 바위그림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신잘라브루가 그룹 12의 도면. 타원 안은 일명 '죄와 벌'이라는 별명이 붙은 그림으로, 바구니 모양의 물건을 훔쳐 도망가는 사람을 세 명이 쫓고 있다. 자료=Yu. Savvateev & N. Lobanova
 
그중 특히 독특한 것은 신잘라브루가를 발굴한 고고학자 사바테예프가 ‘절취(또는 납치)와 처벌’이라고 명명한 그림이다. 이 다중 형상은 연구자들에 의해 일명 ‘죄와 벌’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데, 물론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제목에서 따왔을 것이다. 활을 든 세 명의 남자가 바구니 모양의 물건을 훔친 사람을 쫓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형태가 특이하다. 추격자들의 몸은 백해의 배 모양과 흡사해서 의아함을 자아내는데 다리는 분명히 인간의 다리다. 그들의 머리는 마치 배에 장식된 엘크 머리를 연상시키지만, 허리 약간 아래쪽으로는 화살이 삐죽 나와 있다. 반면, 그들보다 훨씬 작게 묘사된 도망자는 이미 목 부위와 등에 두 대의 화살을 맞은 상태인데 얼핏 보면 마치 짐승의 형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바구니(?)를 들고 있는 것은 짐승의 다리가 아니라 그의 손이다. 훔쳐간 바구니 중 하나는 이미 회수당한 듯하다. 이 재밌는 그림은 해석이 다양한데, 북부와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민속에 등장하는 모티프로서 불 또는 뭔가 중요한 물건을 훔치거나 아이들을 납치한 이야기, 그리고 그 범인을 처벌하는 이야기와 관련짓기도 한다.
 
일명 '죄와 벌'이라는 별명이 붙은 암각화로 낮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바구니 모양의 뭔가를 훔쳐 도망가는 자를 세 명이 쫓고 있다. 도망자는 이미 두 대의 화살을 맞은 상태다. 신잘라브루가 그룹 12. 사진=박성현
 
아쉽게도 낮에는 이 그림이 잘 보이지 않는다. 지의류를 제거하기 위해 알코올 청소가 지속되다 보니, ‘죄와 벌’의 주인공들이 주변의 바위 색과는 구분되게 밝은 빛을 띠면서도 알아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물가에 인접한 다른 그룹들처럼 이 그룹도 댐에서 물이 최대로 방류될 때는 물에 잠긴다 한다. 흥미롭게도 ‘죄와 벌’의 세 추격자 왼쪽 옆에는 커다란 대서양연어가 새겨져 있다. “이 연어는 백해에 서식하면서 강에서 산란하지요. 예전에는 비그강을 따라 급류를 거슬러 올라왔는데, 비그강에 수력발전소가 세워진 후부터는 연어가 오기 힘들어졌어요. 그래서 양어장을 만들어 여러 종류의 물고기를 양식하고 방류합니다.” 벨로모르스크 향토박물관 마리나 가브릴로바 씨의 설명이다. 
 
이른 아침에 촬영돼 상대적으로 잘 보이는 신잘라브루가의 그룹 12. 중앙에 일명 '죄와 벌'로 불리는 그림이 보이고 그 왼쪽에는 커다란 대서양연어가 묘사돼 있다. 사진=베르보프(A. Verbov 2021, 카렐리야암각화관리센터)
 
그림을 좀 더 살펴보자. 도망자와 추격자들 그리고 대서양연어의 아래쪽에는 사슴들이 줄지어 가고 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사슴과 추격자들 사이에는 배도 한 척 놓여 있다. 그림 맨 아래쪽의 장대를 짚은 두 사람을 비롯해 여기저기 사람들이 보이고 발자국도 흩어져 있다. 전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이미지들은 여러 이야기를 담은 채 서로 연결돼 보인다. 비그강 암각화에 반영된 신석기인들의 일상에는 ‘죄와 벌’같이 흥미로운 장면과 더불어 부지런히 뭔가를 하거나 움직이는 모습, 사냥 중심의 노동하는 모습이 포함돼 있다. 전에 언급된 바 있는 예르핀푸다스 그룹 3의 독특한 네 커플, 일명 ‘카렐리야의 카마수트라’로 불리는 남녀 네 쌍의 모습도 성생활과 관련된 이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하겠다(본 연재 11회 참고). 
 
의례 - 두 샤먼과 두 여인
 
백해 암각화에서 의례와 관련된 것으로 해석되는 대표적인 이미지에는 후대 사람들이 일명 ‘흑샤먼’과 ‘백샤먼’이라는 별명을 붙인 형상들이 있다. 흑마술, 백마술이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보통 흑샤먼은 부정적인 이미지, 백샤먼은 긍정적인 이미지로 인식된다. 즉 흑샤먼이 안 좋은 목적으로 주술이나 마법을 행하는 존재라면, 백샤먼은 사람들을 위해 제의를 수행하고 질병을 치료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이른바 ‘흑샤먼’은 구잘라브루가에 위치해 있다. 중앙그룹의 거대한 사슴들 아래에 여러 척의 배가 있고 그 배들 중 하나의 밑에 이 형상이 새겨져 있는데, 현재는 식별하기가 어렵고 특히 머리가 잘 안 보인다. 
 
'흑샤먼'이라는 별칭이 붙은 형상. 구잘라브루가 1936년 라브도니카스(V. Ravdonikas)의 자료 사진. 제공=베르보프(A. Verbov, 카렐리야암각화관리센터)
 
마리나 씨의 설명에 의하면, 이 그림은 두들긴 방식에 차이가 있어 주위의 다른 그림들과는 제작 시기가 다른 것으로 추정된다 한다. 백해 암각화가 약 1,000년에 걸쳐 새겨졌으니 그럴 법하다. 이 형상은 아마도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거나 일종의 영(靈)을 상징하는 것이었을 수 있다. 그가 후대인들에 의해 흑샤먼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그의 손가락이 세 개고, 그의 손 옆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가 있으며, 그 물체 아래에는 뱀으로 보이는 구불구불한 형체가 함께 그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의례용 도구일 수도 있을 이 정체 모를 물체가―물론 이곳의 신석기 주민들은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겠지만―오네가호수 암각화에서 자주 보이던 태양의 상징 기호와 흡사해 그 연관성을 생각해 보게 된다. 
 
일명 '백샤먼' 또는 '춤추는 남자'. 팔을 들고 춤추는 듯한 인물의 주위에 많은 발자국이 찍혀 있다. 신잘라브루가 그룹 2. 사진=박성현
 
한편, ‘백샤먼’으로 불리는 ‘춤추는 남자’는 신잘라브루가 그룹 2에 있다. 이 인물은 손을 들고 있으며 주변에는 발자국들이 많이 찍혀 있어 춤추는 모습을 표현한다. 왼손으로 이 춤추는 남자의 배를 문지르고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현지 주민들의 믿음에 따라 관람객들에게 인기 있는 그림이라 한다.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준다니 역시 백샤먼이라는 별명을 받을 만하다.
 
임산부로 추정되는 두 여인이 마주본 채 팔을 들어 춤을 추는 듯한 모습. 의식에 참여 중인 것으로 해석된다. 신잘라브루가 그룹 15. 사진=박성현
 
의례와 관련해 이목을 끄는 또 하나의 그림은 마주선 두 여인의 모습이다. 배가 나온 것으로 보아 임산부로 추측되는 두 여성이 마주보고 춤을 추는데 아마도 어떤 의식에 참여중인 것으로 보인다. 두 여인의 머리 바로 위에는 사슴 두 마리가 놓여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도 한 마리가 더 있다. 비그강의 신석기 주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인 사슴이 출산을 앞둔 여인들의 머리 위에 묘사된 것은 우연이 아니리라. 이들은 건강한 출산과 나아가 인간과 동물의 재생산, 성공적인 사슴사냥과 다산을 기원하는 의식에 참여 중인 게 아니었을까? 이 밖에도 신잘라브루가 그룹 1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팔을 들고 춤을 추면서 의례에 참가하는 듯한 모습이 있어 흥미롭다.
 
사냥 그리고 충돌
 
사냥은 비그강 하구 암각화의 가장 주된 주제라 할 수 있다. 지난번에 소개한 잘라브루가의 걸작 겨울 엘크사냥과 여름 벨루가사냥 외에도 많은 그룹에서 사냥장면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중 인상적인 하나가 그룹 8의 고래사냥과 그룹 6의 물새사냥이다. 다섯 척의 배가 협동작전으로 고래를 에워싸고 사냥하는 동안, 아직 자유로운 다른 고래 한 마리가 유유자적 헤엄치는 모습도 보인다. 고래사냥 장면의 다른 한쪽에는 엘크 또는 순록이 떼를 지어 가고 일련의 사람들이 스키를 타고 있다. 이 그림에서 중심이 되는 고래는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이고 배들은 옆에서 본 모습이다. 배와 배에 탄 사람들을 위에서 내려다보았다면 알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상이한 각도에서 대상을 입체적으로 묘사한 신석기 예술가의 탁월성이 돋보인다. 
 
여러 척의 배가 함께 고래사냥을 하는 모습. 신잘라브루가 그룹 8. 사진=박성현
 
또 하나의 특징적인 장면은 거위로 추정되는 15마리의 물새를 사냥하는 모습이다. 배의 끝 쪽에 선 사람이 활을 들고 물새를 잡으려 하는데 머리에 깃털 장식을 하고 있다. 거위들의 맞은편에는 역시 깃털 장식을 한 동료가 아마도 몰이꾼의 역할을 맡은 듯하다. 그의 손에는 뭔가 도구가 들려 있다. 이렇듯 비그강의 바위그림에는 구석구석에서 작은 형상들이 각자 나름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으며 그들 모두는 하나의 전체적인 세계를 구성한다.
 
거위로 추정되는 15마리의 물새를 배에서 사냥하는 장면. 신잘라브루가 그룹 6. 사진=박성현
 
하지만 이들에게 평화로운 일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생존을 위해 육지동물과 바다동물을 사냥하는 동안 이들은 때때로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온 외부인들과 충돌해야 했다. 외부의 침입자들 역시 생존을 위해 사냥감을 찾아 이곳으로 왔을 것이다. 비그강 암각화에 새겨진 궁수와 날아다니는 화살, 창과 화살에 쓰러지고 상처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그러한 날들을 비춰주고 있다.
 
자신도 화살을 맞은 채 어딘가를 향해 활을 겨누고 있는 궁수로, 반인반수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의인화 형상이다. 그의 앞에는 곰을 사냥한 작은 사람이 보인다. 신잘라브루가 그룹 4. 사진=박성현
 
잘라브루가의 오두막. 2024년 2월 모습. 사진=베르보프(A. Verbov), 카렐리야암각화관리센터)
 
박성현 경상국립대 학술연구교수 perceptio@hanmail.net
 
신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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