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김현탁은 고전을 현대의 이야기로 재구성하며 연극계에서 입지를 다지고 있는 신진 연출가다. 그에게 고전은 새로운 창작의 모티프일 뿐이다. 원전의 재해석이 아닌, 해체와 재구성이 그의 장기다.
그동안 선 보인 <세일즈맨의 죽음>, <하녀들>, <메디아 온 미디어>등의 연극은 하나같이 현대사회에 날카롭고 비판적 시선을 던지며 주목을 끌었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을 런닝머신 위에 세우고, 그리스 신화 속 메디아 이야기를 미디어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내며 익숙한 고전을 오늘의 이야기로 이끌어낸다. 사회에 던지는 날선 화두가 독특한 실험적 양식에 담기면서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신작 <열녀춘향>도 전작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우리 고전 <춘향전>에서 소재를 땄지만 극의 분위기는 춘향전과 영 딴판이다. '열녀'의 '열'은 절개를 굳게 지키는 '열(烈)'이 아니라 '열십(十)' 자의 의미를 지닌다. 여성에 대한 판타지의 모든 것을 완전수 '십'으로 상징했다.
공연은 총 10개의 장면을 옴니버스식으로 엮었다. 장면마다 한 명의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여자들은 립스틱과 장지갑, MP3 플레이어 등 일상에서 흔히 보는 사물에서 성적인 코드를 읽는가 하면, 미인대회에 출전해 춘향전 속 대사를 선문답처럼 주고받는다.
각 장면을 통해 공연은 여성에 대한 우리사회의 욕망을 하나하나 발가벗긴다. 요리강좌, 체조 경기, 오케스트라 연주, 대걸레로 한자 쓰기, 프로레슬링, 인공호흡 등이 차례로 이어지다 9번째 장면에서 9명의 여자가 등장해 소녀시대 안무를 소화하는데 그 모습이 한 없이 유쾌하면서도 얼굴을 화끈거리게 한다. 마지막 열번째 장면은 욕망의 대상이 되는 대신 참아내야 했던 '달콤한' 수모를 여성의 몸을 통해 가학적으로 상징한다
흥미로운 점은 <열녀춘향> 무대에 등장하는 여성들에게 남성의 욕망뿐만 아니라 여성 자신의 욕망도 투사된다는 것이다. 사각형 무대 바깥에는 남자들의 시선, 그리고 한 여자의 시선이 공존한다. 여성을 탐하는 남자들의 시선과 스스로를 살피는 여자의 시선이 끊임없이 무대에 겹쳐지며 작품은 성정치학의 복잡다단한 결을 만들어낸다.
극단 성북동비둘기, 작·연출·무대·소품·음악 김현탁, 기술 서지원, 드라마투르그 이예은, 조명 김은주, 의상 정인정, 안무 이은주, 출연 김미옥, 최우성, 오성택, 김선영, 염순식, 박문지, 전채희, 이은주, 박선혜, 박현지, 강민지, 염문경, 김신혜, 정인정, 이진성 등. 3월31일까지 게릴라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