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을 한 번 창출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국민의 신뢰를 다시 얻어 재집권하는 일은 훨씬 어렵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재집권에 성공한 정당들을 보면 공통된 특징이 있다. 자신들의 핵심 가치와 정체성은 지키면서도 시대 변화에 맞춰 새로운 유권자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최근 유시민 작가가 제시한 ABC론과 증축론도 결국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에 대한 제안으로 읽힌다. 일부에서는 그의 주장이 민주당의 외연 확장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비판하지만, 민주당이 앞으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를 묻는 문제 제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적절하다.
ABC론은 사람을 선과 악으로 가르기 위한 이론이 아니다. 정치에 참여하는 동기를 가치(A), 이익(B), 가치와 현실의 조화(C)라는 세 가지 유형으로 설명하는 분석 틀이다. 유시민은 민주주의와 개혁이라는 원칙을 지키려는 A가 정당의 중심을 이루어야 하고, 국정 운영에서는 현실 감각을 갖춘 C가 그 역할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본다. 반면 권력 유지나 개인의 이해관계가 당 운영의 중심이 되면 정당은 국민의 신뢰를 잃기 쉽다고 진단한다. 이는 사람을 낙인찍기 위한 구분이 아니라, 정당이 어떤 가치 위에서 운영돼야 하는지를 되묻는 정치적 메시지에 가깝다.
민주당의 지난 경험도 이 논의와 무관하지 않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혁명 이후 높은 기대 속에 출범했지만,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부동산 가격 급등, LH 투기 사태, 조국 사태를 둘러싼 공정성 논란 등이 이어지면서 중도층의 신뢰가 흔들렸다. 민주당의 가치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기보다 국민이 기대했던 공정과 실용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반대로 2024년 총선에서는 민생 회복과 민주주의 수호를 전면에 내세우며 폭넓은 공감을 얻었고, 이는 압승으로 이어졌다. 결국 선거는 가치와 실용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경쟁이 아니라, 두 요소를 얼마나 설득력 있게 결합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증축론은 이런 문제의식을 더 쉽게 설명한다. 유시민은 민주당을 하나의 집에 비유했다. 민주화의 역사와 개혁의 가치, 오랫동안 당을 지켜온 핵심 지지층은 집의 기초이자 기둥이다. 더 많은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집을 넓히는 일은 필요하지만, 기둥부터 허물어서는 집 자체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외연 확장은 정체성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그 토대 위에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물론 다른 시각도 있다. 핵심 지지층을 지나치게 의식하면 중도층 확장이 어려워지고, 선거에서 필요한 현실적 선택을 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다. 실제로 정당은 다양한 계층과 세대의 지지를 얻어야 집권할 수 있다. 그러나 외연 확장과 정체성 유지는 반드시 충돌하는 가치만은 아니다. 최근 영국 노동당과 독일 사회민주당도 전통적 가치와 국정 운영 능력을 함께 강조하며 다시 국민의 선택을 받았다. 물론 재집권의 배경에는 경제 상황과 상대 정당의 실책, 지도부 변화 등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했다. 그럼에도 핵심 가치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더 넓은 유권자를 설득하려 했다는 점은 두 사례의 공통된 특징으로 평가된다.
이재명 정부가 추진하는 AI와 반도체 산업 육성, 지역균형발전, 에너지 전환 역시 같은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장과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정책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청년과 지방에 새로운 기회를 만드는 정책과 함께 갈 때 비로소 더 넓은 국민적 지지를 얻을 수 있다. 지속 가능한 성장은 경제적 성과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성장의 과실이 공정하게 나누어진다는 믿음이 함께 형성될 때 정책은 비로소 정치적 신뢰를 얻게 된다. 이것이 유시민이 말한 '가치를 잃지 않는 실용', 즉 A와 C의 조화가 갖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유시민의 제안이 민주당의 유일한 해답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정치에는 언제나 다양한 전략이 존재하고 시대가 바뀌면 해법도 달라질 수 있다. 다만 국민이 왜 한 정당에 국정을 맡겼는지, 그 출발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문제의식만큼은 가볍게 넘길 수 없다. ABC론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묻고, 증축론은 어떻게 더 넓은 국민 속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제시한다. 정권 재창출은 과거를 부정하는 재건축이 아니라, 튼튼한 기초 위에 더 많은 국민이 함께할 공간을 넓혀 가는 증축에서 시작된다. 그것이야말로 민주당이 다음 시대를 준비하며 가장 먼저 되새겨야 할 정치의 기본 원칙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