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를 봐주는 값은 얼마가 적당할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 으레 자녀 부부부터 탓하기 마련이다. 부모가 아이를 봐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고맙다는 말뿐 보상보다는 요구만 늘어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얼마나 힘들겠느냐’며 육아에 힘을 보태려고 팔을 걷어붙였던 조부모가 나중에는 “내가 너희를 위해 어떻게 했는데”라며 주변에 서운함을 털어놓는 경우도 있다. 사랑이 앞서 선을 긋지 못한 채 무리하다가 뒤늦게 불만을 쏟아내는 것은 아닌지, 조부모 자신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얼마 전 제주도로 반년쯤 요양을 떠난다는 가까운 지인과 긴 통화를 했다. 불면증과 우울증세에 면역계 치료까지 받고 있는 터라 잠시 떠나있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병의 원인 중 하나가 오랜 시간 감당해 온 손주 돌봄과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지인의 조카는 전문직 신혼부부였다. 아이가 태어나자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하는 육아도우미를 월 500만 원에 고용했다. 여기에 아기 엄마의 가사와 사실상 엄마 역할까지 대신해 줄 사람으로 지인을 불렀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거처를 마련해 주고 별도의 급여를지급하는 조건이었다.
처음에는 친조카의 아이를 제 손주처럼 돌보는 일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아기가 커가면서 자연스레 가사일이 늘어났다. 조카인 아기 엄마와의 갈등도 생겼지만 내색을 못했다. 근무시간은 자연스럽게 길어졌고, 아침과 저녁 식사까지 챙겨야 했다. 주말에도 일을 해야 하는 날이 늘었다. 급기야 출근하는 아기 아빠의 새벽밥까지 요구받자 지인은 결국 결심을 굳히고 오래 기달렸던 육아은퇴를 감행했다.
지인은 자신의 집과 조카의 집을 오가며 두 집 살림을 해야 했다. 배우자 역시 조카네 집안 일에 관여하게 되면서 부부의 생활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렇게 2년을 겨우 버티다 아이가 유치원에 갈 때까지만 도와달라는
조카를 설득해서 겨우 조카 손주 돌봄을 내려놓았다. 다행히 지인 부부가 연금으로 생활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대단히 특별한 경우이지만, 우리 주변에서 많이들 겪고 있는 심각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녀가 특별히 신생아를 키울 때, 육아도우미와 별도의 돌봄 인력에게 지급하는 비용은 상당한 규모인데, 조부모가 그 역할을 맡으면 ‘가족이니까’라는 이유로 이런 이중의 노동을 쉽게 무상으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조부모가 아이를 전적으로 돌본다면, 그 시간과 가사노동, 건강의 소모를 돈으로 환산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요즘에는 손주를 돌보기 위해 자녀가 사는 곳으로 이사하거나, 아예 같은 아파트 단지 또는 주변이 원룸을 얻는 조부모도 있다. 맞벌이 자녀를 돕기 위해 양가 조부모 여섯 명이 순번을 정해 한 아이를 돌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조부모는 자신의 노후 계획과 건강, 부부만의 시간을 뒤로 미룬다.
이제는 손주 돌봄에도 최소한의 합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전세계약서가 당사자들의 권리와 의무를 분명히 하듯, 가족 사이에도 ‘손주돌봄 표준계약서’ 같은 것이 있다면 어떨까.
돌봄 시간과 주당 돌봄 일수, 맡을 가사의 범위를 미리 정하고, 주말이나 심야 돌봄에는 추가 보상을 책정하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심야 돌봄이나 출동이 발생했을 때 수당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고, 여행이나 휴식이 필요할 때는 얼마 전까지 통보해야 하는지도 정할 수 있다. 무엇보다 조부모에게는 언제든 돌봄을 중단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런 계약이 가족 사이의 정을 삭막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가족이라는 이유로 생략해 버린 약속을 다시 확인하는 장치에 가깝다. 사랑과 호의가 노동으로 바뀌는 순간, 아무런 기준도 없는 관계는 쉽게 원망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물론 손주 돌봄의 부담과 갈등이 우리 사회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 등에서도 조부모의 돌봄 부담을 둘러싼 갈등이 있다는 이야기를 접한다. 다만 나라별 가족문화와 복지제도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분명한 것은 아기를 돌보는 일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국가가 돌봄 문제를 정책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도 필요하다. 그러나 제도와 예산을 논하기 전에, 지금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일부터 제대로 들여다봐야 한다.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무한히 사용할 수 있는 권리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조부모 역시 자신의 희생을 무조건적인 미덕으로 포장한 채 한계를 숨겨서는 안 된다.
손주를 사랑하는 마음과 손주를 전담해 키우는 일은 다르다. 자녀를 돕고 싶은 마음이 클수록 오히려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약속을 생략하지 말고, 사랑이 원망으로 변하기 전에 서로의 삶을 지킬 선부터 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