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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봄비를 맞으며
2018-04-20 06:00:00 2018-04-20 09:22:08
처음에는 몰랐다. 아파트 베란다에 몇 년 동안 방치해 놓았던 화분에서 싹이 트고 있었다는 것을, 봄비가 내린 어느 날의 아침에서야 알았다. 이미 세상을 향해 잎을 내밀고 있었는데도 나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생명이란 이런 것이다. 죽은 줄 알았는데 기적처럼 살아나는 것, 그것이 생명이다. 푸른 싹이 다시 살아난 기쁨을 내 가슴에 거침없이 경이와 희열의 문장으로 쓰고 있다. 누가 사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생명을 얻은 화분이 제법 싱싱한 빛깔로 세상의 한 모퉁이를 호흡하고 있다. 서둘러 그 화분을 아파트 화단으로 거처를 옮겨 주었더니, 나의 무관심을 나무라기라도 하듯, 봄비는 생명수처럼 화분의 품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봄비 속에서, 저 화분이 다시 튼튼한 생명으로 자라나 이 세상에 아름다운 향기를 전해줄 것을 기도하였다.
 
이런 기분에 젖어 봄비 내리는 하늘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몇 편의 시가 떠오른다. 시조시인 박기섭(1954~)은 「봄비」 라는 시에서, “하늘 어느 한갓진 데 국수틀을 걸어 놓고 봄비는 가지런히 면발을 뽑고 있다// 산동네 늦잔칫집에 安南 색시 오던 날”이라고 노래했다. 시가 품고 있는 발상이 재미있고 놀랍다. 더불어 의미심장한 생명의 기운도 느껴져 외우고 있는 작품이다. 산동네 늦잔칫집에 安南 색시 오던 날에, 봄비가 하늘 어느 한갓진 데 국수틀을 걸어 놓고 가지런히 면발을 뽑고 있는 풍경,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자제하고 싶지 않다. 잔칫집에 들어가 그렇게 뽑아낸 국수 한 그릇 먹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찌 나 혼자만의 감정이겠는가. 이 시에 등장하는 ‘안남(安南)’은 베트남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우리들의 귀에 익숙한 시,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 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외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고 봄비를 노래한 시인 이수복(1924-1986)의 「봄비」도 우리에게는 친숙한 봄의 문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편, 가난했던 시절의 봄비를 회상한 시를 발표하여 아직도 우리들의 명치끝을 아리게 하는 작품이 있는데, 시인 박용래(1925-1980)의 작품 「그 봄비」가 바로 그것이다.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라고 하는 이 시는 두어 번 되뇌기라도 하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감흥을 유발시킨다. 이처럼 봄비를 주제 혹은 소재로 한 주옥같은 명작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들에게 봄비와 같은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지금 여기저기에서 봄비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있는 수많은 생명들도 차분하게 이 계절을 노래하는 문장을 쓰고 있다. 며칠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한껏 자태를 뽐냈던 벚꽃의 문장은 아름다움과 슬픔이 혼재된 미학을 던져주고 갔다. 요란하지도 않은 봄비에 놀라 무심하게 떨어진 목련꽃 이파리들은 ‘왜 그리 일찍 떨어졌느냐’ 고 다그치는 바람(風)에 이끌려 다닌 탓에, 멍이 들어버린 문장으로 우리들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산 여기저기에서 사람들과 동물들과 새들의 관심을 끌던 짙은 핑크빛의 진달래도 봄비를 맞으며 또 다른 그리움의 문장을 낳고 있다. 비록 봄비를 느끼는 주체들의 생각만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봄비는 또 다른 생명을 위하여 또 다른 변화를 위하여 꿈틀거릴 것이 분명하다.
 
봄비는 우리들에게 이 모든 풍광 앞에서, 살아있기에 맛볼 수 있는 무한의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한다. 계절에 어울리는 문장을 담담하게 그리고 소박하게 써 내려가라고 재촉한다. 우리의 일상을 어지럽히는 미세먼지를 씻어내듯, 우리를 괴롭혔던 가슴 아픈 사연들도 말끔하게 씻어내라고 한다. 봄비가 되어 보자. 혹여 봄이 되었는데도 우리가 돌보지 못했던 생명들이 있다면 살펴볼 일이다. 봄비처럼 한 번 더 촉촉하게 스며들어 보자. 마음이 따뜻해지리라. 모든 것을 그냥 내버려두기에는 봄이 자꾸만 짧아지고 있지 않은가.
 
오석륜 시인/인덕대학교 일본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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