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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칼럼)휴거·빌거·반거는 슬프다
2019-08-23 06:00:00 2019-08-23 06:00:00
어릴적 읽었던 동화책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삽화와 내용이 인상적이었는지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기억에 있다. 40평대와 20평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의 갈등 이야기였는데 부모들이 나서서 같이 놀지 말라고 하는 내용이 담겼던 그 삽화의 잔해는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있다. ·호수에 따라 편을 가르고, 부의 잣대로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현실에서도 '휴거(휴먼시아 거지), 주거(주공아파트거지), 빌거(빌라거지), 반거(반지하거지)' 이야기가 나돈다. 그것도 주로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주로 쓰이는 말이라고 하니 충격적이다. '래미안, 자이, 힐스테이트' 같은 고급 브랜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과 임대아파트나 빌라, 그보다 못한 사람들을 철저하게 분리시켜 아이들에게까지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이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저자 조남주의 신작 <사하맨션>도 지금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 가상의 도시국가를 배경 삼아 사회 주류에서 버림받고 배척당한 소수자들이 살아가는 '사하맨션'속 입주민들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낸 이 소설은 너무나 현실과 닮았다. 사하맨션 거주민들은 주민권도 체류권도 없이 불법 체류자로 전락해 낡은 아파트에 모여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간다. 반면 우리나라는 누구나 주민권을 갖고 있음에도 어릴 때부터 아파트 평수나, 임대아파트에 사는 의미를 알게된다. 소설 보다 더 슬픈 현실 속 삶이다.
 
사실 휴먼시아는 'Human(인간)' + 'sia(넓은공간,대지)'의 합성어로 인간이 중심이 되는 최고의 도시주거공간 이라는 뜻이다. 정부 또한 주거복지를 위해 노력해왔고, 공공·임대·장기전세 주택 등을 확대하며 주거안정에 힘써왔다. 하지만 여전히 주택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주택 이외의 거처'에 거주하는 가구는 약 37만 가구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작년 기준으로 일터의 일부 공간 등 기타가 18, 고시원 15, 숙박업소 객실 3, 판잣집·비닐하우스 7000가구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이중 수도권에서 주택 이외의 거처에 거주하는 가구가 19만가구인데 68.7%가 고시원·고시텔에 거주하고 있고, 고시원 거주 75%가 청년가구였다. 통계로 잡히기 어려운 부분을 감안하면 100만이 넘는 가구가 제대로 된 주거공간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임대주택에 사는 것조차 색안경 끼는 한국사회에서 주택 이외의 거처에 사는 사람들은 소설 '사하맨션' 사람들보다 더 못한 지경에 살고 있는 셈이다. 정부가 최근 취약계층 주거공간 확보를 위해 국유지에도 행복주택이나 신혼희망타운 등으로 공급키로 했다. 도심 노후 청사를 복합 개발해 청년층을 위한 거주 공간을 마련키로 한 것이다. 이미 정부는 주거불안 안정을 위해 저렴한 공공주택을 많이 짓고 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주거안정을 위한 대책을 끊임없이 내놓고 있다. 하지만 덩그러니 주택만 짓는 정책으로는 이제 어렵다. 안정적인 '보금자리'를 마련해도 편히 쉴 수 없다면 그것은 주거공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숫자에 집착해 물리적인 공간 확보에 급급하기 보다는, 누구나 같은 공간에 살며시 스며들 수 있도록 갈등까지 줄이는 방향의 정책이 선행되길 바란다. 휴거, 빌거, 반거 라는 단어는 슬프다
 
김하늬 정책부 기자(hani4879@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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