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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주거독립사)③군산 조선미곡주식회사 사택
입력 : 2015-06-26 오후 12:00:00
토마토 미디어그룹에서는 광복 70주년에 기해 특집 다큐멘터리 [한국인 주거독립사]를 준비중이다. 11월 방영 예정이며 3부작으로 기획된 본 다큐멘터리는 일본 강점기 이전과 이후달라진 우리의 주거공간을 살펴본다. 1부에서는 박정희문화주택을, 2부에서는 이금재 고택을 통해 일본 강점기 과도기적인 주택양식과 우리의 전통 주택을 살펴보았다. 3부에서는 이제 진짜 일본식 가옥을 만난다.마로 미곡수탈 중심항이었던 군산의 조선미곡주식회사 사택이다.(편집자)
 
집 안에 우물이 있다. 사진/알토마토
“제가 군산에 온 지 60년 정도 됐습니다.”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다. 집은 죄가 없다. 이용하는 사람과 그 시대의 의미가 단지 별개로 존재할 뿐이다. 적산가옥, 적이 남기고 간 집이라는 뜻을 지닌 이 집은 그렇게 여지껏 살아남았다. 이 집에 깃든지 이제 60년이 된다는 이경산 선생에게 물었다. 이 집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별 다른 이유는 없었다고 했다. 타지에서 군산으로 이사온 그는 마침 집이 필요했고 그의 아내가 무척이나 이 집을 마음에 들어했다.
 
그렇게 집과 주인은 인연을 맺었다. 집 안에 우물이 있고 욕실에는 욕조 개념의 가마솥이 걸려있었다. 여타 일본식 가옥과 달리 일본식 정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집이었다. 그의 아내가 이 집을 택한 것은 뼈대가 튼튼해보이니 수리만 잘 하면 오래도록 쓸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이라면 생각하기 어려운 집이다.
 
조선미곡주식회사사택의 모습. 사진/알토마토
◇해방과 6.25를 겪은 집
 
이경산 선생이 처음 이 집을 만났을 때, 군산은 6.25를 막 넘어선 시기였다.
 
“이 집에 방이 여섯 개요. 그런데 내가 여기 처음 와서 보니까 여섯 가구가 살고 있었어.”
 
양잿물로 집을 샅샅이 닦아내고 부서진 곳들을 수리했다. 전 주인은 일본인인 통운의 사장이었다. 그가 떠난 자리에 여섯 세대가 살면서 집은 험해질 대로 험해져 있었다. 20여일을 들여 집을 수리하고 그는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다. 이 집 정원에서 처음부터 있었던 식물은 윗머리가 잘려나간 향나무 한 그루가 전부다. 모두 선생의 손을 거켜 자란 식물들. 이제 정원은 풍성하다.
 
“사람들이 이거 헐어버리고 양옥을 짓지 그러냐고 했어요.”
 
하지만 이 집에서 아이들을 다 키운 그는 오히려 집을 그대로 보존해나가기로 했다. 그렇게 적산가옥은 역사가 되었다. 이 집의 옆에는 그럴싸한 요즘 건물이 우뚝 서서 보는 이에게 격세지감을 선사한다.
 
군산시의 전경. 사진/알토마토
◇주인 없는 집의 주인들
 
현재 군산에는 강점기 당시의 근대주택들이 다수 남아있다. 적국의 가옥이었지만 해방 후,그리고 동란 후 주택 부족을 겪었던 한국은 이를 헐어버릴 수 없었다. 일본인 주인이 떠나자 한국인이 적산가옥을 무단점유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해방 이후 3년이 지나도록 일본인 소유의 적산가옥, 그리고 그 와중에 한국인이 구입한 적산가옥의 구분이 명확히 정리되지 않았다는 기사(1947년 2월 11일 동아일보)도 눈에 띈다.
 
해방 당시 한국을 떠나는 일본인들은 아는 한국인에게 적산가옥을 기증하거나 싼값에 팔기도 했다. 일부 부패한 공직자들은 돈을 받고 허위 매매계약서를 써주기도 하는 등, 적산가옥 처리 문제는 한동안 정부에게 골칫거리였다. 정부의 입장에서 적산가옥은 주택자원이자 과세수단이었다. 쉽사리 철거하라고,또는 공공화하겠다고, 혹은 민간 시장에 맡기겠다고 말할 수도 없었으리라.
 
작은 빌딩과 이웃한 과거의 집. 사진/알토마토
◇의식주 정체성은 보수적이기에
 
시민의 입장에서는 어땠을까? 적산가옥은 잠시나마 부유했던 일본인이 남긴 고급 주택 또는 상점이었으리라. 집 자체도 많지 않았던 그때, 누구라도 적산가옥을 가지고 싶었으리라.
 
이렇게 말도탈도 많았던 적산가옥. 하지만 있는 그대로 지금까지 살아남은 적산가옥은 많지 않다(1947년,서울시에서 시민들의 자발적 신고로 조사된 적산가옥의 수만 해도 사만삼천 호 이상이었다.) 개조되어 본연의 모습이 사라지거나 아예 헐린 것이다. 이들이 사라진 이유는 의미심장하다.
 
남향이 다수인 한국의 가옥들과 달리 적산가옥은 일정한 향의 선호도가 없었다(그래서 서울에 남은 적산가옥들은 해방 후 향에 따라 부유층의 것이 되기도,심지어 선택받지 못하기도 했다.) 난방과 배수 조건이 한국의 기후와는 맞지 않았다. 게다가 조선미곡주식회사 사택처럼 남아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는 개조되거나 60년대에 헐리고 말았다. 헐린 자리에는 대개 남향의 양옥이 들어섰다.
 
대들보 아래 장식이 화려하다. 사진/알토마토
◇주인과 함께 온전히, 명료하게
 
“통운 사장 아들이라는 일본사람도 왔다 갔어요. 아버지 보여준다고 사진을 찍어 갔지.”
 
결국 살아남아 역사의 한 조각이 된 이 집은 이제 현실적인 주거공간 그 이상의 의미가 되었다.
 
“안방에 저 장식. 대들보 아래 저게 화려하면 일본에서 잘 사는 집이었다고.”
 
방의 사방에 미닫이 문이 있는 집. 한국과 달리 트인 안방공간. 애정 없이는 살기 어려워보인다.
 
“이 스위치는 일본 강점기때부터 붙어있던 거예요.”
 
주택주 이경산 선생은 철없는 방문객을 챙긴다. 하나라도 놓칠세라 세심하게 집을 소개했다. 주인은 집과 함께 나이를 먹어간다. 삐걱거리는 나무 마루처럼, 주인의 무릎도 삐걱거린다. 그러나 집 모양새가 온전한 것은 깨끗하고 명료한 집주인의 기억과 꼭 닮았다. 그가 60년을 가꾼 정원에는 이제 호박벌이 놀고 연산홍이 만발했다.
 
촬영 중, 열린 문을 열고 뜻하지 않은 방문객이 들어서기도 한다.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 근대문화재의 내부를 운 좋게 구경하게 된 처자다. 역사가 된 집은 이제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며 한 해 또 한 해를 살아나간다.
 
 
이도화 알토마토PD
 
손정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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