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 미디어그룹에서는 광복 70주년에 기해 특집 다큐멘터리 [한국인 주거독립사]를 준비중이다. 11월 방영 예정이며 3부작으로 기획된 본 다큐멘터리는 일본 강점기 이전과 이후 달라진 우리의 주거공간을 살펴본다.(편집자)
군산과 더불어 강점기 군항이었던 진해. 이곳에는 장옥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잘 보아야 보이고 자꾸 보아야 근대유적 같다. 진해의 근대유적들, 장옥거리는 그런 곳이었다.
진해 시내 전경. 사진/알토마토
물결 곱고 깊고 넓은 세계적 군항. 그러나 지금은 일본해군의 요항
-1926년 9월 30일 동아일보
중국 침탈을 위한 군항기지. 일본에 진해는 당시 군항거점지였다. 미곡수출항이었던 군산과는 다른 분위기다. 임진년 충무공이 이곳에서 거둔 승리가 무색할 정도로 바뀐 진해. 동양제일의 요새로 불린 진해는 일본군이 발을 딛는 입구가 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일본으로 밀입국하는 사건이 종종 벌어졌던 진해에는 아직 당시의 건축물들이 남아있다. 일본인들의 상업과 거주지가 번성했던 곳에는 어김없이 본정(本町: 그 지역 중앙의 의미)으로 불렸던 흔적이 남아있다.
진해에도 본정이 있었다. 군산과 부산,그리고 서울의 충무로가 본정으로 불렸던 것과 같다. 진해를 가면 옛 것인 듯 아닌 듯 요즘 것들과 어울려 있는 건물들에 놀라는 일이 흔하다. 거리를 걷다보면 ‘흔한 근대건물’을 보게 된다.
그 중에서도 장옥거리는 짦은 거리지만 일관성 있는 건물들이 줄지어 남아 관광객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과거 일본인들의 상점거리였을 이곳에는 1층은 상가이면서 2층은 주택인 장옥이 줄지어 서 있었다. 바로 맞은 편에는 높은 오피스텔 건물이 서 있다. 표지판을 보지 않고 급히 발걸음을 재촉한다면 쉽게 지나쳐버릴 모양새의 건물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일본건물 특징인 토부쿠로(戶袋: 덧문을 수납하는 두껍닫이) 가 보인다.
이 오래된 건물을 과거를 기억하는 유산으로 남기고 싶어하는 집주인이 있었다. 황해당인판사의 정기원 선생이었다. 그는 우리를 만나기 위해 링거를 맞고 막 병원에서 집으로 왔다고 했다.
토부쿠로. 덧문을 수납하는 공간이다. 사진/알토마토
같은 적산가옥이다보니 군산의 조선미곡주식회사 사택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사택은 거주목적의 성격이 뚜렷한 반면, 황해당인판사는 거주와 장사의 양면성이 돋보인다.
현재 1층은 인쇄소와 사무실로, 2층은 정기원 선생의 거주지로 사용 중이다. 장옥, 긴 집이라는 뜻으로 과거 조선시대 장행랑과 비슷한 형태다. 조선시대 종로거리의 상가가 복층으로 도열한 모습과 과거 이 장옥거리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상업적 목적이 있는 곳이다보니 이곳은 정원이 따로 없다. 집은 일본식 장옥이고 집주인은 황해도 사람이다. 그의 말투와 그 중 자주 등장하는 진해라는 이름, 그리고 일본 원어로 그가 설명하는 집에 대한 이야기가 이색적이었다.
“미지마 아이라는 내외간이 살았고 아랫층은 문방구와 담뱃가게를 했습니다. 2층은 여관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집주인 정기원 선생. 사진/알토마토
집과 주인장은 한국 격변기를 온몸으로 벼텨낸 사람들이다. 담뱃가게이자 여관(이는 추정되는 바다)으로 지어진 이 집은 미지마 아이라는 일본인이 지은 후 적산가옥이 되었다가 6.25를 거쳐 정기원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이 집의 주인인 정기원 선생은 6.25 때, 옹진반도의 섬을 거져 이곳 진해에 51년 6월 초 이곳에서 해군에 지원한다. 그리고 전역 후 1958년 10월 15일, 이방인과 적산가옥은 인연을 맻는다. 바로 이 자리에서그렇게 황해당인판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바로 앞에 진해시청이 있었으니까 시청 상대로 해서 도장이나 인쇄,기념품 이런 걸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먼지에 덮힌 손조판 활자들이 1층 뒤편에서 잠을 자고 있다. “1997년,한국 해군이 소련까지 갈 적에 울산함이 갔을 때 기념품까지도 제가 만들어줬어요.” 나이를 먹고 선생은 은퇴를 한다. 분주했던 프레스, 인쇄기, 손길을 기다리던 활자들도 함께 은퇴를 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사진/알토마토
2층으로 올라가는 입구는 좁고 어두웠다. 풀샷으로 전체를 찍기에는 좁은 복도. 일본가옥 특유의 특징이다. 트인 공간 하나 없는 2층. 아무리 봐도 일반 살림집으로는 보이지 않는다.올라가는 입구는 하나, 방은 여러 개. 그러나 주방이 없는 2층 구조. 그리고 방마다 마련된 오시이레(벽부장).
그래서 정기원 선생은 이곳이 아마 여관이었을 것이라 추측해본다(내심 듣는 우리도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남아있는 적산가옥들의 주인들이 그러하듯, 정기원 선생도 이 집을 가급적 그대로 쓰기 위해 노력했다. 이불을 들추자 다다미(일본식 바닥재)가 보인다. 특성상 습기에 쉽게 썩는 다다미가 아직도 남아있다. 천장도 여전히 목재다. 밖으로 통하는 창이 전면에 크게 난 방. 지금은 이 방이 거실의 역할을 하고 있다. 연로한 이가 오르내리기에는 쉽지 않는 계단. 그래도 집을 바꾸지 않고 사람이 적응해갔다. 하나 더한 것이라고는 계단 옆에 손잡이를 단 것 정도다.
집은 사람을 위해 살기 편해야 한다는 요즘 생각과 정기원 선생의 생각은 조금 다를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이 집을 보존하고 싶어 하는지. 여기 저기 일본색이 뚜렷한 이 집이, 근대유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그는 말했다.
진해 장옥거리. 사진/알토마토
“이왕이면 좀더 옛날 것 그대로 보존을 하고 싶고, 이 곳이 그냥 관람하는 곳이 아니라 나라사랑을 배울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보존에 대한 의지에 공감이 간다. 장옥거리부터 진해 시내 곳곳을 돌아보며 느낀다. 아직까지 상품화되지 않았구나.
지방자치단체가 근대유물을 상업화할 때는 그곳이 눈에 드러나게 만든다. 곳곳에 표지판을 세우고 그 역사를 콘텐츠화한다. 관련한 축제를 만들거나 관광상품을 확대하는 등 방법은 참 많다. 하지만 진해에서는 그 유명하다는 건물들을 찾아보기 참 어려웠다. 아마 정기원 선생의 황해당인판사가 나라사랑을 배울 수 있는 곳이 되려면, 작은 표지판이라도 하나 더 늘려줘야 할 것 같다. 그의 시간도, 복원이 필요해보이는 황해당인판사의 시간도 끝을 향해 더욱 더 빨리 가기 시작했지만 그의 바람이 이뤄지기에는 아직도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황해당인판사. 글자가 참 또박또박하다. 사진/알토마토
황해당인판사라는 이름이 문득 궁금했다. 인은 도장, 판은 인쇄일텐데. 굳이 황해당을 붙여 어려운 이름을 만든 이유.
“군대 생활하다가 전역해서 여기에 황해당이라는 간판을 걸었습니다. 내가 황해도 사람이니까 우리 고향 사람 지나가다가 만나면 얼마나 좋겠나 해서 황해당이라고 걸었습니다.”
이름 덕에 가끔 들어와 황해도분인지 물어보는 분들도 있었다. 정말 고향사람을 그렇게 만나기도 했단다. 쉽게 보기 힘든 인쇄기구들부터 활자, 선생이 틈틈이 모아놓은 한국 근대사 사료들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 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황해당인판사는 박물관이 될 준비를 잘 마친 듯 하다.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통일이라는 말이 문자 이상의 의미를 잃어버린 지금, 시간이 갈수록 이곳을 찾는 황해도 사람들은 줄어들게 될 일이다. 조금만 더 빨리 이곳이 정기원 선생의 뜻에 맞게 근대유물로 거듭나기를 바라본다.
이도화 알토마토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