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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맛의 인문학)⑤커피향이 만들어내는 근대와 탈근대의 대립과 융합
입력 : 2016-03-09 오전 6:00:00
그렇다면 내 기억 속 ‘심포니’의 커피향은 커피 자체의 향기라기보다는 공간의 향기였던 셈일까. 우주공간에서 중력에 의해 공간이 비틀어지듯이 기억 또한 공간을 재창조한다. 기억에 의한 공간의 재창조는 개인 차원 뿐 아니라 집단 차원에서도 가능하다. 이 재창조는 역사에서 파시즘의 창안으로까지 이어졌다. 한낱 커피향에서 파시즘의 지평이 열릴 리는 없겠고, 반대로 장 자크 루소는 ‘심포니’의 사이폰이 물을 끓여 올렸듯 죽음을 앞둔 삶의 기억에서 커피를 끌어올렸다.
 
그곳을 생각하면 눈 오는 풍경이 생각난다. 주먹만 한 함박눈이 창을 가득 채우고 무수한 하얀 동그라미 너머엔 내 또래 여자아이들이 종종걸음 치던, 어쩐지 풍경화 같지는 않고 추상화 같은 이미지. 눈이 내리면 약간 비탈진 입구가 미끄러워 조심하며 지치듯 내려와야 했다. 1층엔 ‘봉고’라는 이름의 타악연주자 류복성의 연주실을 겸한 카페가 있었고, ‘봉고’를 지나 계단을 올라간 2층이 목적지였다.
 
문을 열면, 온통 커피 세상이었다. 다른 세상의 공기가 코의 점막뿐 아니라 온몸을 싸안았다.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고, 창밖으로 이화교가 보이는, ‘봉고’의 2층 ‘심포니’의 문 너머엔, 커피 이상의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것을 그저 두고 온 젊음이라고 눙치고 넘어가기엔 그곳의 커피향이 너무 진했다. 달콤했다.
 
이대앞 심포니 기억하시는 분 있나요?
옆으로 기다란 하얀 네모 안에 ‘심포니’를 검색어로 넣고, 가운데 ‘검색’만큼만 색깔이 빈 연두색 네모에다 클릭하였더니 그 중에서 “이대앞 심포니 기억하시는 분 있나요?”란 카페 글을 찾을 수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이화여대 정문 옆 소문 난 커피전문점 ‘심포니’에서 글쓴이는 20년 전 추억을 늘어놓았다.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4월 쯤 연대생이랑 롯데월드에서 미팅하고, 그중 한 명과 심포니에서 ‘애프터’를 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연대생의 과 친구가 찾아와 롯데껌 한통을 내놓더니 만원을 달라고 땡깡을 부렸다.(당시에는 데이트하는 친구를 찾아가 상대방에게 껌을 팔곤 했다.)
 
하하하
 
20년 전의 이화여대생, 글쓴이의 웃음이 PC 모니터 밖으로 색조를 짐작하기 힘들게 울려 퍼졌다. 그는 그때를 “인생의 가장 빛나던 시절”이자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회고했다. 결론은 그 시절이 그렇게 영원히 지나버린 것 같아 “시간의 비가역성이 맘 아픕니다”였다.
 
^^
 
같은 공간을 추억하는, 어쩌면 같은 좌석에 앉기도 하였을 20년 전의 그 이화여대생의 아픈 마음을 이해하지만 나는 같이 마음이 아프지는 않다. 내 마음은 오히려 “아픕니다” 다음에 이어진 ^^에 반응하여, 애잔해진다. 신원미상의 그 이화여대생과 소담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창밖을 눅눅하게 바라보는 중일 테고, 마실 커피의 종류를 굳이 고를 필요는 없었다.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 단골에 따라 좋아하는 음악을 구별하여 틀어주었다는 그 주인장이 골라주는 커피면 족하였다.
 
검색 결과 중에는 같은 회사에 같은 연도에 들어온 이화여대 출신 입사동기의 에세이 유형 기사가 있었다. 주말판 쯤에 올라갔을 10년도 더 지난 그의 기사를 읽는 동안 그와 내가 공유한 공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해 들어온 여러 명의 입사동기 중에 그와 나는 이제 그 공간을 공유하지 않고, ‘심포니’처럼 기억을 공유할 뿐이다. ‘심포니’와 이화교를 둘러보는 그의 기사를 읽으며 나는, 그와의 사이에 특별히 애틋한 사연은 없지만, 드물지 않게 자판기커피라도 나누었을 그때의 공간을 ‘팝업’시켰다. 시간은 비가역적이지만 기억은 가역적이어서 젊은 날의 나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첫 번째 이화여대생의 회고와 달리 그 공간의 나는 빛나는 모습이 아니다. 식은 커피처럼 그래도 받아들일 수는 있는 모습이다. 만일 시간 뿐 아니라 기억도 비가역적이라면, 우리 인생은 갓 내린 커피처럼 늘 싱싱할 수 있겠다.
 
기억 속의 향보다 감미로운 건 없다
‘심포니’의 커피 추출방법은 독특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사이폰(siphone) 커피라고 하는 퍼콜레이터(percolater) 커피를 제공하였다. ‘percolate’는 “액체를 거르다” 또는 “스며들다”의 의미를 지닌다. 퍼콜레이터는 빨대(또는 사이폰)에 의해 아래위로 연결된 2개의 플라스크를 말한다. 물이 담긴 아래쪽 플라스크와 커피가루가 있는 위쪽 플라스크를 밀착 연결한 뒤 물을 끓이면 아래쪽 플라스크의 압력이 커지고, 압력에 의해 물은 위쪽 플라스크로 밀려올라가 대기 중인 커피가루와 몸을 섞는다. 뜨거운 물과 커피가루가 혼연일체가 되었다 싶을 때 불을 끄면 아래쪽 플라스크의 압력이 내려간다. 압력차이가 소멸하면 커피가루를 충분히 흡수한 커피추출액은 중력에 의해서 이제 아래쪽 플라스크로 내려온다. 아래쪽 플라스크를 분리해서 잔에 따라 마시면 된다.
 
퍼콜레이터 밑에 있는 불과, 운우지정이라도 되는 듯 물과 커피가 섞이는 역동적인 움직임을 볼 수 있는 게 사이폰 커피의 매력이었다. 부글부글 끓이며 우려내는 동안 사전에 커피 향을 충분히 맡을 수 있다는 매력 또한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 그러나 끓이는 과정에서 커피 향의 대부분이 날아가 버려 정작 마실 때에는 향을 거의 음미할 수 없다는 게 단점이다. 그런 연유로 그다지 훌륭한 커피 추출법이 아니라는 게 커피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그렇다면 내 기억 속 ‘심포니’의 커피향은 커피 자체의 향기라기보다는 공간의 향기였던 셈일까. 우주공간에서 중력에 의해 공간이 비틀어지듯이 기억 또한 공간을 재창조한다. 기억에 의한 공간의 재창조는 개인 차원 뿐 아니라 집단 차원에서도 가능하다. 이 재창조는 역사에서 파시즘의 창안으로까지 이어졌다. 한낱 커피향에서 파시즘의 지평이 열릴 리는 없겠고, 반대로 장 자크 루소는 ‘심포니’의 사이폰이 물을 끓여 올렸듯 죽음을 앞둔 삶의 기억에서 커피를 끌어올렸다.
 
삽화/김희헌
 
루소의 유언
“아, 이제 더 이상 커피 잔을 들 수 없구나.”
커피와 관련한 많은 글에서 인용되는 루소의 유언이다. 모두 설(說)이라는 단서를 붙이는 걸로 봐서 사실인지는 불분명한 모양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 문장이 루소의 유언으로 통용된다는 것이고, 그가 유명한 커피애호가였음을 떠나서 그에서 어울릴 법한 유언이기에 그것으로 충분하다.
 
루소의 무덤 앞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자신과 루소 둘 중 하나만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어도 세상은 보다 조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은둔자이자 방랑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루소는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마찬가지로 커피애호가로, 카페 로열이란 커피음용법의 주인공 나폴레옹과 더불어 그는 근대의 주춧돌을 놓은 몇 명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루소의 근대는 자연과 문명이 혼란스럽게 대립하고 갈등하는 가운데 불가피하게 얽힌다. 그러다 보니 볼테르 같은 계몽주의자로부터 “루소의 글을 읽으면 네발로 걷고 싶은 욕망이 생길 것”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당하기도 했다. 교육학의 고전인 <에밀>을 썼지만, 정작 자신은 자식들을 고아원으로 보낸 모순까지, 근대의 문을 연 그의 삶과 사상은 때로 포스트모던과 연결된다.
 
루소의 커피는 사이폰 커피여야 한다. 상승만을 욕망하는 계몽적이고 근대적인 열망의 플라스크와 뒤죽박죽 혼란스럽게 뒤엉키지만 낯선 가능성을 잉태하는 탈근대적 플라스크가 맞물려, 불길이 잦아들면 음용 가능한 전혀 새로운 산출물을 만들어내는 퍼콜레이터. 때로 많은 오해와 편견에 직면한 루소의 세상은 퍼콜레이터 커피 같은 것일 수 있겠다.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젊은 날의 나는 ‘심포니’에서 그 이화여대생 뿐 아니라 루소도 만났을 것이다. 당연히 창밖에 눈이 내리고 창안에는 알코올 램프 위 플라스크 속에서 커피가 향기를 발산하며 끓고 있었을 게다. 어쩌면 창이 없는 어둑한 세미나실에서 그 조우가 이뤄졌을지 모르겠지만, 동일하게 앞에는 사이폰에서 커피가 끓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나는 최근 근대적 커피와 결별하였다. 10년 넘게 쓴 이탈리아제 커피머신을 버리고 드립커피로 돌아갔다. 커피원두를 갈아서 가루를 거름종이 위에 올리고 그 위에다 끓인 물을 부어서 내려먹는다. 시간이 더 걸리고 조금 더 불편하다. 복귀가 더 옛날로 향하였으니, 탈근대가 아니라 전근대인가.
 
크레마까지 넉넉하게 띄운 아메리카노나 에스프레소를 버튼 하나로 대령하는 커피머신. 편리한 커피머신을 떠나 담담한 맛의 드립커피로 복귀한 데에 특별한 이유는 없다. 커피기계가 늙었고, 새로 커피기계를 장만할 필요나 열정이 부재하다는 것이 아마도 가장 합리적인 해석일 테다. 커피 취향의 각성이나 탈근대적 호사 같은 건 생각지도 않은 일이다. 그냥 동그란 거름종이 안에서 더운 물이 검은 커피가루와 티격태격하다 아래로 소멸하는 광경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커피를 내리거나 마시는 동안 원하면 음악은 내가 틀어도 되지만 굳이 그럴 것까지 없다. 커피의 여과를 지켜본다고 하기가 조금 애매하다. 사실 그저 기다린다. 사이폰 커피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물이 밑으로 내려가도록 기다리는 게 크게 불편하지 않다. 나에게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다.
 
안치용 토마토CSR연구소장
손정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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