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수사한 박영수 특검팀은 삼성을 포함한 53개의 대기업이 미르·K스포츠재단에 774억을 출연했다는 내용이 포함된 최종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특검은 박 대통령이 최씨와 공모해 “삼성으로부터 298억원대(약속 금액 포함 433억원대) 금품을 받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청탁을 직접 받아 특혜성 조치를 취하도록 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가장 많은 금액을 출연한 삼성을 포함한 재계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삼성 측 변호인들은 지난 9일 첫 공판에서 “미르·K스포츠 재단 출연과 최순실씨 딸 정유라에 대한 승마 지원은 모두 박 대통령의 강요와 압박으로 불가피하게 이뤄진 일일 뿐 대가를 바란 뇌물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여론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밝혀지지 않았으면 계속 같은 일이 반복되었을 것 아니냐는 의심이다.
한국 기업지배구조 수준, 아시아 11개국 중 8위
기업이 불법 자금 제공을 통제하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로 한국 상장회사의 낙후된 기업지배구조가 꼽힌다. 아시아기업지배구조협회(ACGA)가 지난해 발표한 ‘2016년 아시아 기업 지배 구조 보고서(CG Watch 2016 – Ecosystems matter)’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기업지배구조 수준은 아시아 11개 국가 중 8위이다.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에 가까스로 앞섰다. 일본, 홍콩은 물론 대만,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보다도 낮은 순위를 차지했다.
자료 : 아시아기업지배구조협회 'CG Watch 2016' 재구성
한국 상장회사의 지배구조 수준에 대한 외국의 인식은 최근 더욱 악화되고 있는 추세다. 대표 기업들의 지배구조 관련 스캔들과, 정경유착 스캔들이 원인으로 꼽힌다. 모든 스캔들의 기저에는 낙후된 기업지배구조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국회도 지배구조 관련 환경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모양새다. 작년 20대 국회 개원 직후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개정안 수건이 발의되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바른정당 등 야 3당은 ‘오신환 의원 대표발의 상법 개정안’을 토대로 일부 수정한 방안에 합의했다. 합의안은 ▲기업 인적분할 시 자사주의 신주 배정 금지 ▲전자투표제 의무화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감사위원 분리선출 등 네 가지 방안을 담고 있다. 당초 ‘김종인 의원 대표발의 상법개정안’으로 논의되던 재벌개혁안 중 사외이사 독립성 강화, 집중투표제 의무화, 주주대표소송제 강화는 제외됐다.
합의안 중 ‘인적분할 시 자사주 신주 배정 금지’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지주회사로의 전환은 특별한 기여 없이 지배주주의 지배권 강화를 야기한다. 현행법상 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나뉠 때(인적분할) 분할된 사업회사의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지만, 인적분할 후 지주회사가 되는 회사는 기존 자사주에 대해 자회사 신주를 배정받아 의결권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른바 ‘자사주 매직’이다.
지배주주는 인적분할 시 지주회사에 의견권이 발생한 자사주를 몰아주는 방법으로 지배력을 확대할 수 있다. 이는 소액주주를 포함한 전체주주의 이익을 위한다기보단 일부 지배주주의 이익을 위한 자사주의 오남용이다. 이번 개정을 통해 인적분할 시 자사주 신주 배정을 제한한 방안을 통해 일부 지배주주의 자사주 오남용을 예방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오 의원이 대표 발의한 상법개정안은 시행시기가 공포 후 1년으로 규정되어 있어, 기업의 시간을 벌어주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일정 수 이상의 주주가 존재하는 경우 소액주주가 주주총회에 직접 참석하지 않고도 인터넷망 등을 통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전자투표제’의 의무화도 개정안에 포함됐다. 매년 반복되는 ‘슈퍼주총데이’가 사실상 소액주주의 의결권 행사를 가로막고 있다는 문제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예탁결제원의 자료에 따르면 올해의 슈퍼주총데이는 더욱 강화됐다. 정기 주총 공시 상장사 2052개사 중에서 약 45%에 해당하는 924개사가 지난 3월 24일에 주주총회를 열었다. 2016년의 경우 3월 25일 금요일에 818개사가 주주총회를 열어 그해의 슈퍼주총데이로 기록됐다. 이번 방안을 통해 소액주주의 의결권 행사를 가능하게 한다는 방침이다.
퇴진행동 재벌특위와 반올림, 삼성노동인권지킴이가 삼성전자 주주총회가 열리는 24일 오전 서울 삼성 본사사옥 정문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등기이사 자격 박탈과 사회적 책임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다중대표소송제’는 모회사 지분을 1% 이상 소유한 주주가 자회사 경영진의 불법행위 등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한 방안이다.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경영을 견제하는 것을 돕는 장치로, 재벌의 전횡을 막고 소수의 주주를 보호한다는 취지다. 현재 국회에서는 다중대표소송 대상에 관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모회사의 자회사 지분율 30% 또는 50%로 지정하면 해당 범위가 넓어 기업의 경영 위축되고 소송이 남발되는 등의 부작용이 발생할 우려가 크다는 지적이다. 미국, 일본처럼 다중대표소송 대상을 100% 자회사로 제한하자는 의견이 유력하다.
‘감사위원 분리선출’은 주총에서 이사를 선출하고 선임된 이사 중에서 감사위원을 뽑는 현행 방식과 달리 처음부터 독립적 지위를 갖는 감사위원을 별도로 선임하는 제도다. 이번 방안에는 투기 자본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장치를 넣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총자산 2조원 이상 상장회사들이 감사위원회를 반드시 설치해야 하는 법 조항을 수정해 상근 감사 또는 감사위원회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했다. 총자산 2조원 이상 상장회사의 경영권 공격에 대한 우려를 없애기 위해 감사위원회를 설치하지 않고, 상근 감사 제도를 선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상근 감사들은 이사가 아니기 때문에 경영에 관여할 수 없다.
감사위원 선출시 대주주가 적용 받는 ‘3% 의결권 제한’도 완화했다. 기존 ‘합산 3% 의결권 제한’은 최대 주주와 특수관계인의 지분의 합에 대한 의결권을 3%로 제한해왔다. 이번 개정을 통해 특수 관계인의 지분을 제외하고 최대주주의 지분에 대해서만 의결권을 제한하는 ‘단순 3% 의결권 제한’으로 완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법개정안의 3월 임시국회 통과는 사실상 무산됐다. 빨라야 대선 이후에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의 법안 개정이 어렵다면 시장규율에 의한 지배구조 개선 방식을 모색하는 것도 방법이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의 정재규 선임연구위원은 “외국의 경우 법률에 의한 기업지배구조 개선 방식을 보완하거나, 상황에 따라 이를 대체하기도 하는 시장규율에 의한 지배구조 개선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시장규율에 의한 지배구조 개선 방식을 적극적으로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시장규율에 의한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노력
우리나라의 시장규율에 의한 지배구조개선은 작년 7월 개정된 ‘기업지배구조 모범규준’과 같은 해 12월 제정된 한국 스튜어드십 코드 ‘기관투자자의 수탁자 책임에 관한 원칙’으로 두 개의 큰 축으로 구성돼 있다.
기업지배구조 모범규준은 상장회사의 기업지배구조 최선관행(Best Practices)을 모아 민간에서 작성하여 제시한 강제성이 없는 자율적인 가이드라인이다. 한국거래소가 지난 10일부터 투자정보 제공 확대와 기업 경영투명성 강화를 위해 적용한 ‘원칙준수·예외설명(Comply or Explain)’ 방식의 기업지배구조 공시제도에서 모범규준이 적용됐다. 공시제도는 모범규준과 해외 주요 기관의 기업지배구조원칙 등을 고려하여 선정한 10개의 핵심원칙에 대하여 기업이 준수여부(comply)와 준수하지 않았을 때 투자자에게 사유를 설명하도록(explain) 하는 방침이다.
‘Comply or Explain’은 탄력적이고 시장친화적인 자율규제 방식이다. 법적 규제의 경직성을 보완하고 시장 상황, 기업 여건 등에 따라 공시 의무를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 평판이나 경영투명성 제고를 희망하는 기업이 자발적으로 공시하는 것으로, 미이행에 따른 별도의 제재조치는 없다. 참고로 미국과 일본은 우리나라 상장규정에 따르는 뉴욕증권거래소(NYSE) 지배구조 가이드라인(상장규정), 일본은 도쿄증권거래소(TSE) 기업지배구조 모범규준(상장규정)에 따라 준수여부 정보 공시가 의무화되어 있다.
시장규율에 의한 지배구조 개선 방안의 두 번째 축은 스튜어드십 코드 활성화다. 스튜어드십 코드의 활성화를 통해 기관투자자의 적극적인 역할을 유도하고 이를 기반으로 자본시장의 건전한 발전까지 도모한다는 것이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관투자가가 가입자들의 재산을 성실히 관리하기 위해 준수해야 할 관리의 원칙이 명시돼있다. 의결권 행사의 구체적 내용과 사유를 공개하고 이를 고객과 수익자에게 주기적으로 보고할 것을 요구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한다.
자료 :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보도자료 재구성
스튜어드십 코드 활성화를 위해선 연기금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국민연금 등 연기금이 코드에 가입함으로써 다른 기관투자자들의 참여를 고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기관투자자가 코드를 도입할수록 시장의 감시 기능은 한층 더 강화된다. 2014년 2월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일본의 경우, 도입 첫해에 우리나라의 국민연금 격인 GPIF(후생연금펀드)가 코드에 가입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그 해 6월까지 127개 기관투자자가 가입하였다. GPIF는 세계 최대 규모의 연기금이다. 일본 금융청 자료에 따르면 2016년 12월 27일 기준 일본 GPIF 포함 연기금 26사, 신탁은행 7사, 자산운용사 152사, 보험사 22사, 기타 7사 등 총 214개 기관이 이를 채택해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300여개의 기관투자가 가운데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곳은 아직까지 없다. 다만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의 보도자료에 따르면 지난 2월 열린 스튜어드십 코드 참여 예정 기관 간담회에서 미래에셋자산운용, 삼성자산운용, 트러스톤자산운용, 한국투자신탁운용 등 총 8개사가 스튜어드십 코드에 참여할 것임을 밝혔다.
송은하 KSRN기자
편집 KSRN집행위원회(www.ksr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