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17 프렛(Fret·기타와 베이스의 지판 전체에 균등한 간격으로 설치된 쇠막대로 숫자 별로 구분) 밴딩으로 시작하는 고역대 기타 솔로는 안개 속에 핀 작은 빛과 같은 것. 이윽고 팜뮤트의 장중한 6현음 연주가 '콰콰광' 하며 쇠뭉치 같은 드럼 리듬과 함께 터져나옵니다.
그 사운드의 낙하 사이로 유려하게 피어나는 이율배반적 성음. '까맣게 흐르는 깊은 이밤에 나홀로 외로이 잠못이루네/ 파란 별빛만이 나의 창가로 찾아드네.'(1989년 1집 'Miracle' 타이틀곡 '깊은 밤의 서정곡')
"연습실에서 수천번 연습하고 다듬었던 곡이었거든요. 안개가 자욱한 밤 도시를 연상했어요. 그 속 작은 움직임 하나, 그게 고민하고 있던 저였던 거죠."(주상균) 졸업 이후 사회 초년생의 혼란스런 심경을 표현한 이 곡에서 비춰집니다. 우리 시대의 흔들리는 청춘의 표상이. 엄혹한 시대를 뚫고 피어난 한줄기 꽃과 같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내년 데뷔 35주년을 맞는 한국 헤비메탈 밴드 블랙홀. 사진=블랙홀·사운드트리
한국 헤비메탈계의 큰 형님 '블랙홀'이 내년 35주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14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사운드트리' 사옥에서 만난 멤버 주상균(보컬·기타), 이원재(기타), 김세호(베이스), 이관욱(드럼)은 "이 오랜 기간 '메탈 외길'을 걸어온 것만으로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며 "2~3년 안에 내게 될 10집을 잠정적으로 마지막 앨범이라 여기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1~2집 작업 때부터 '우리가 10집까지 낼 수 있다면 음악인으로 성공한 삶이 아닐까' 생각했거든요. 블랙홀은 매 음반마다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음악보다는, 각 시대를 정리해왔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마지막 음반에서는 9집에 이어 더 희망적인 것, 미래에 대한 삶을 순수하게 담아낼 작정입니다."
이들은 "헤비메탈의 정신은 '스트레이트(정직하고 올곧은)'한 것"이라며 "침묵을 강요당하거나 에둘러 이야기하던 시대를 지나오면서도 우린 늘 자신의 목소리를 가감없이 낼 수 있는 이 음악의 매력에 빠져온 것 같다"고 했습니다.
내년 데뷔 35주년을 맞는 한국 헤비메탈 밴드 블랙홀. 사진=블랙홀·사운드트리
1980년대 중후반, 한국이 메탈 붐을 들끓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국외적으로는 ‘보는 음악’ MTV가 해외의 ‘쇼킹한 음악’들을 국내에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딥 퍼플,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주다스 프리스트, 머틀리 크루…. 국내에서는 들국화, 산울림, 송골매부터 각 대학 동아리 밴드들이 판을 열었습니다. 각 학교에서는 반에 2~3팀씩 스쿨 밴드들이 생겨났습니다. 이 때 스쿨밴드 출신의 ‘메탈키드’들은 훗날 대중음악 질서를 주도한 주역들입니다. 신해철, 이승환, 서태지, 김종서가 대표적.
밴드 붐을 타고 국내에선 시나위, 부활, 백두산이 ‘한국 메탈’에 본격 불을 지폈습니다. 블랙홀이 결성된 것도 이 무렵인 1985년. 팀명에 대해 주상균은 "드러나지는 않더라도 지구의 중력처럼 중심을 잡아주는 음악이 우주의 블랙홀 같다고 생각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편적인 인간 군상, 튀거나 모나지 않는 평범한 인성의 사람들이 내는 하모니'라 봐주시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오는 19일 오후 5시, 서울 노들섬에서는 '34주년 기념 콘서트'를 엽니다. 지금까지의 블랙홀을 정리하는 '밝은 톤의 곡 구성'으로 무대를 채울 계획입니다. 주디 갈런드 'Somewhere over the rainbow'의 편곡 버전으로 오프닝을 열고, 말랑한 파란톤의 전자음이 메탈과 밸런스를 이루는 'UTOPIA'(9집 'EVOLUTION')가 뒤따릅니다. '비가 오는 도시 위에는 달의 강이 흐른다(1995년 정규 5집 수록 연주곡 'City Life Story')'에선 7분 간 악기들의 곡예로 우수에 젖은 가을을 그려낼 작정.
"'노을(1991년 정규 2집 'Survive' 수록곡)'과 '비가 개인 뒤에(1994년 정규 3집 'Black Hole' 수록곡)'도 연결해서 할 거거든요. 기분이 짠하고 즐거울 거에요."(주상균) "'3옥타브 미'까지 올리는 제 죽어나가는 모습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하하."(이원재)
내년 데뷔 35주년을 맞는 한국 헤비메탈 밴드 블랙홀. 사진=블랙홀·사운드트리
'삶(2005년 정규 8집 'Hero')'에서 보여주던 토속성을 결합시킨 한국형 메탈 수작들도 선보일 계획입니다. 군사독재 시절과 대마초 파동, 장발 단속, 민주화, 88올림픽….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흘러온 밴드의 역사의식을 담백하게 수놓는 '독도는 우리땅', '평양으로 보낸 Love Letter(1995년 정규 4집 'Made in Korea' 수록곡)'도 준비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지방으로 전근을 다니시던 아버님 덕에 농악을 많이 접했거든요. 우리 DNA에 숨어있는 그 리듬들이 사실 헤비메탈이 보여주는 에너지와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해왔어요. '삶'에 나오는 아쟁 연주, 판소리 창법은 사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몸에 스며있을 익숙한 소리지요. 한국적인 메탈이란 무엇일지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거든요."(주상균)
굵직한 과거 시대들을 주물러가며 만들어낸 한국형 메탈음악은 9집 'EVOLUTION'부터 미래를 향했습니다. 잠정적인 마지막 음반 10집 역시 "함께 살아온 이들과 앞으로 함께 살아갈 이들에 대한 공감대"가 큰 주제가 될 것이라 합니다. "9집 음반 전까지 우리 음악은 검정색이었다고 봐요. 사색적이고 탐구적인 음악이었으니까. 그 이후로는 노란색이 점차 보이는 것 같아요. 꼬마 신사숙녀도 저희 공연 오면 펄펄 뛰고 좋아해요."(주상균)
34년 활동 기간 중 단 1주도 합주를 쉰 적이 없다고 합니다. '연주의 일상화'가 지금의 블랙홀을 있게 한 것이라고.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도 30명 규모의 소극장에서 전국투어를 꾸준히 이어오고 유튜브 생중계 라이브도 했습니다. 음향·영상 등의 분야에서 전문가가 된 팬덤 '블랙홀원정대'는 함께 투어를 도와주는 든든한 지원군입니다.
내년 데뷔 35주년을 맞는 한국 헤비메탈 밴드 블랙홀. 사진=블랙홀·사운드트리
지난 세월 블랙홀의 음악을 어떤 여행지로 비유할 수 있을까.
"은하철도 999 같은 거죠. 알 수 없는 미래에 만나게 될 사람들과 함께 하는."(이원재)
"저는 대동여지도 같은 거라고 봐요. 목적을 가지고 걷거든요. 많은 곳을 다니고 기록하고 의미를 남기고. 누가 시켜서 하거나 얻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걷다보니까 보였고, 만났기 때문에 공감했고."(주상균)
"차나 비행기를 타보고 간 적은 없는데 계속 걸었던 것 같아. 타볼만 한 거 같은데 하다가도 다시 걷게 되고."(이원재)
"세호는 3~4년 해보니까 어떻니. 빠른 차를 탄줄 알았는데 다 걷고 있었지?"(이원재)
"이 형들 진짜 다 걷고 있더라고요. 한국메탈의 대동여지도, 맞는 거 같아요."(김세호)
"하하하.(모두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