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지 어느덧 2년이 흘렀다. 아직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수많은 국제정치적 질문을 제기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유엔의 역할 문제다. 서방의 주류적 시각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전후 유엔 체제 및 탈냉전 규칙에 대한 유례 없는 정면 도전으로 간주한다. 특히, 국제평화와 안전을 담보해야 할 유엔이 제 기능을 상실한 채 마비되어 있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유엔의 기능 부전은 우리 입장에서도 현실적 문제로 다가온다. 북한이 ICBM 발사 등 도발을 거듭해도 중국, 러시아의 제동으로 안보리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유엔의 마비를 우크라이나 전쟁과 러시아의 규범 위반이라는 관점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유엔 시스템에 대한 일면적인 이해에 그칠 수가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을 둘러싼 논란과 마찬가지로 그 파급 효과에 대해서도 역사적 맥락을 살펴야 국제정치의 작동 원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고 적절한 대응 방안 모색도 가능할 것이다.
유엔은 집단안보의 정신에 의해 창설된 기구다. 집단안보는 구성원 중 누구든 어느 한 나라를 공격할 경우 나머지 전체 회원국이 공동 행동을 통해 침략국을 응징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평화에 대한 위협, 파괴, 그리고 침략 행위를 규정한 유엔 헌장 제7장이 이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유엔 헌장은 평화유지의 책무를 유엔 총회가 아니라 안전보장이사회에 위임하고 있으며, 안보리의 5대 상임이사국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거부권 부여의 논리는 강대국 전쟁 방지에 있다. 핵을 보유한 P5 국가에 대해 무력 응징이 이루어진다면 제3차 세계 대전으로 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거부권(veto)이란 특권이 보장되지 않았다면 국제연합 창설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 유엔의 무기력한 모습은 얄타에서 유엔을 설계한 전승국들이 처음부터 의도해 온 바라고 할 수 있다. 안보리의 마비는 제도의 결함도 아니고 특정 국가의 악용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도 아니다. 원래 유엔은 그런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고, 지금 설계된 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임이사국의 의사에 반해 유엔의 집단안보가 작동하길 기대하는 것은 제도 자체의 취지에 반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그럴 경우 세계평화와 안정을 오히려 위협할 수도 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 일부 우방국이 불만을 표시할 수는 있어도 제재에 나설 서방 국가는 없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인도, 브라질 등 남반구 국가들이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적어도 강대국의 이해가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합의도 이루어지기 어렵거니와 단결된 제재와 응징은 더더욱 실현되기 어렵다.
강대국의 거부권으로 국제분쟁에 유엔이 무력했던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1957년 인도와 파키스탄 분쟁에 대해 소련은 거부권을 행사했고, 1970년대 미국은 이스라엘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한 결의안 채택을 막은 바 있다.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이나 1960년대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서도 유엔은 무기력함을 드러냈다. 역사상 유엔의 집단안보가 성공적으로 작동한 것은 아주 예외적으로서 사실상 한국전쟁과 걸프전, 두 차례뿐이었다. 이 경우도 유엔의 결정에 따라 회원국의 공동 행동이 도출된 것이 아니고, 먼저 미국의 결정이 있고 난 후 유엔은 이를 추인하는 역할에 가까웠다. 최근 2023년 12월 8일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한 유엔 결의안도 미국의 거부권으로 안보리 문턱을 넘지 못했다.
물론 강대국의 이해가 일치한 경우엔 유엔이 움직일 공간이 생긴다. 냉전 시대 거의 마비 수준에 있던 유엔이 1990년대 이후엔 평화유지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것이 대표적이다. 유엔은 캄보디아, 동티모르 위기 시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며, 말리, 남수단, 아이티 위기에도 관여했다. 또한 환경, 공중 보건, 국제 형사사법 등에 관한 문제 해결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모두 미국, 러시아, 중국 등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이 의견의 일치를 이룬 덕분이다. 상임이사국으로서는 자신들의 핵심 이익만 침범하지 않는다면 특권이 보장된 유엔 자체가 무력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 때문에 유엔 시스템의 본질이 집단안보가 아니라 강대국 협조체제에 가깝다는 견해도 있다. ‘1국 1표’가 주어지는 유엔 총회의 민주적 원칙과 달리 국제평화 유지의 핵심기구인 안보리는 철저히 강대국 중심의 불평등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엔이 작동을 멈췄다거나 위기에 처했다는 지적은 유엔 시스템 자체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유엔은 예나 지금이나 한계도 뚜렷하고 효용도 있다. 분명한 것은 국제평화를 유지하는 핵심 기제는 집단안보가 아니라 힘의 균형과 노련한 외교라는 점이다. 유엔을 탓하며 개탄하기보다는 전쟁과 평화에 대한 안목과 분별력을 갖추는 것이 난세를 헤쳐가는 출발이자 지정학적 중간국인 한국에 요구되는 소양이 아닐까? 전쟁의 문턱이 낮아진 위험한 시대, 국제정치의 본질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김정섭 세종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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