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은 사전적 의미로 동일 목적에 이기거나 앞서려고 겨루는 것을 말한다. 자유주의 신봉자들은 경쟁이 있으면 통제 장치가 필요 없다고 주창한다. 권력의 간섭 없이도 주체 간의 행위가 서로 조정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스미스의 국부론을 보면, 인간의 양심처럼 경제도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한다고 말한다. 상품의 가격·물량을 통제하면 경쟁의 자발적 조정능력이 사라지는 이치와 같다. 치안 유지 등 정부가 해야 할 최소한 몫과 자유에 대한 침해를 배제해야한다는 ‘작은 정부론’이다.
반면 케인즈 이론인 수정자본주의의 궁극은 ‘큰 정부’다. 소득불평등이 심화되면서 정부 역할의 필요성이 맞섰다. 1970년대 오일쇼크 충격파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시장의 실패를 불러온 비대 정부 시대는 ‘작은 정부’를 더욱 부채질했다.
1980년 레이건은 “정부개입을 줄이겠다”는 ‘작은 정부’로 집권했다. 감세, 규제철폐 등 작은 정부의 레이거노믹스 핵심 가치는 70년대 선봉장들이 설파하던 신자유주의 시대를 열었다.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운동 이후 눈부신 압축경제성장을 일궈낸 우리나라도 김영삼 정부 시절 작은 정부를 지향했다.
지주에게 수탈당하고 가난이 숙명이라고 여기던 봉건주의를 거쳐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자본 개념은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레이건 정권은 국가 재정 악화의 각종 부작용을 불러왔다. 김영삼 정부도 ‘외환위기’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경제 난국을 시장원리에만 맡길 경우 파국을 맞는다는 교훈은 전후사를 통해 엿 볼 수 있다. 코비드 팬데믹을 맞은 지금이 더욱 그렇다. 지난 대선 큰 정부를 선언한 현 정권은 기업이 아닌 사람 중심의 정책을 위한 경제 패러다임 변화를 내걸었다.
경제민주화·재벌개혁 등 고질적 담론의 종지부도 기대했다. 재벌가의 사리사욕을 위해 기울여진 운동장에서 펼쳐지는 시장 무질서를 더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기조도 읽혔다.
보이지 않는 손을 위한 ‘경쟁’ 앞에 ‘공정’이 필수라는 것도 깨달았다. 지난날 극심한 불평등·양극화를 불러온 반칙 경쟁은 영리만 추구한 이익집단 시대였다. 바로 잡을 규칙을 위해 공정경제3법이 등장했다.
재벌 기업은 지나친 규제라며 볼멘소리다. 과연 옥죄기인가. 이 제도는 오히려 기업 봐주기식에 불과하다. 독소조항이라고 지적한 ‘3%룰’의 감사위원분리 선출제는 감사위원 3명 중 1명을 두는데 그쳤다.
거수기 속에서 소액주주를 대변하는 1명이 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소송 남발을 우려한 다중대표소송은 오너가 자회사를 통한 사익편취로 손실을 끼칠 경우 배상비용이 모회사로 귀속된다. 일종의 공익소송이다. 소송을 일삼는 미국도 실제 제기하는 경우가 드물다.
의식있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최소한의 견제 장치로 실제 작동 효력이 없다고 지적한다. 오죽하면 야권 위원장이 박근혜 정권보다 약하다 했을가. 미국은 시장주의를 시조로 하나 피해에 대해 막강한 주주제를 바탕에 두고 있다.
시장에 맡길 것을 요구하면서 감시 견제는 받지 않겠다는 이중적 잣대는 한국경제의 미래를 더욱 암울하게 할 뿐이다. 애덤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와 시장을 신뢰한 것은 인간의 양심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아직 기업윤리가 남아있다면 말이다.
이규하 정책데스크 judi@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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