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난세를 극복하는 처세술로 ‘후흑학’(厚黑學)이 잘 알려져 있다.
‘후흑’(厚黑)은 낯이 두껍다는 ‘면후’(面厚)와 시커먼 속마음을 뜻하는 심흑(心黑), 즉 뻔뻔하고 음흉함을 겸비한 처세술을 가리킨다.
이런 중국식 처세술이 우리의 대권레이스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 ‘착하고 정의로운’ 대통령보다는 오히려 ‘낯이 두껍고 속이 음흉한’ 대통령이 나라를 더 잘 이끌 수 있다는 실용 대통령론이 먹혀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처세술을 후흑학이라 명명한 청나라 말의 리쭝우(李宗吾)는 후흑학을 서구열강의 침탈로 위기에 빠진 중국을 구하는 ‘후흑구국‘(厚黑救國)의 경지로 승화시켰다.
그러면서 그는 후흑의 절대 강자로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최종 승자인 월왕 구천을 꼽았다. 월왕 구천은 회계 싸움에서 오왕 부차에 진 뒤 오왕의 신하를 자처했고, 그의 처는 부처의 첩으로 보냈다. 와신상담의 세월을 보낸 후 부차를 꺾은 구천은 결국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칼날의 빛을 칼집에 숨기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는 ‘도광양회’의 외교 정책으로 미국을 속여 마침내 G2의 위상을 확보한 후, 미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며 ‘화평굴기’를 외치고 있는 작금의 중국의 외교 행보를 ’후흑학‘의 전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후흑을 원용한 ‘뻔뻔하고 음흉한’ 중국의 처세 외교술이 오늘날 패권국 중국굴기로 거듭난 것이다.
삼국지의 유방도 ‘후흑의 대가’로 꼽힌다.
항우가 부친을 인질로 잡아 삶아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오히려 그 국 한 사발을 나눠달라고 했고, 초나라 병사에게 쫓기자 수레의 무게를 덜기 위해 자식들을 세 번이나 마차에서 발로 차 밀어낸 유방이다. 천하를 얻은 뒤 유방은 한신과 팽월을 태연자약하게 ‘토사구팽’했다.
후흑의 단계는 크게 3단계로 구분한다.
제1단계는 ‘후여성장’(厚如城墻), ‘흑여매탄’(黑如煤炭)이라고 하는 ‘낯가죽이 성벽처럼 두껍고 속마음이 숯덩이처럼 시꺼먼 상태’를 말한다. 제2단계는 ‘후이경(厚而硬), 흑이량(黑而亮)’으로, 낯가죽이 두꺼우면서도 딱딱하고 속마음이 검으면서도 맑은 상태로 어떠한 공격이나 욕설을 들어도 미동도 하지 않는 경지다. 제3단계는 ‘후이무형(厚而無形), 흑이무색(黑而無色)’으로 낯가죽이 두꺼우면서도 형체가 없고, 속마음이 시꺼먼데도 보기에 따라서는 무색으로 보이는 초월적인 경지를 가리킨다. 월왕 구천과 유비는 후흑의 2단계로 평가된다.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에 바탕을 둔 ‘박백’(薄白)을 치세의 처세술이라고 한다면 왕조의 운명이 날마다 바뀌는 난세의 중원에서는 뻔뻔하고 음흉한 후흑의 처세술이 세상을 헤쳐나가는 지혜로 성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후흑의 처세술이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는 과정에서 자신과 가족의 각종 의혹이 제기되고 수많은 흠결이 드러나고 법정에서 유죄가 확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정하지 않고 야당과 언론을 공격하고 있는 조국 전 장관의 처신을 보면 ‘후흑학’을 탐독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의 ‘후흑술’은 생경하지만 먹혀드는 중이다.
후흑의 궁극의 경지는 ‘불후불흑’(不厚不黑)이다. 뻔뻔하고 음흉하다 못해 오히려 순진하고 정의로운 듯 보이게 하는 무공(武功)이다.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의 최종승자는 이재명 경기도지사다. 이 지사가 가야 할 대권의 길은 험난하다. 경선 과정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원팀’을 구성해야 하고, 무엇보다 ’대장동‘이라는 악재를 정면이든 우회하든 간에 넘어서야 한다. 이 지사가 경기도에 대한 국회의 국정감사를 받겠다며 일전불퇴의 자세를 보이는 것은 후흑의 처세로는 더할 나위 없이 잘하고 있다고 박수를 받을 만하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겠다‘는 그의 각오처럼 그는 그동안 자신을 둘러싼 각종 추문에 대해 후흑의 기교를 십분 발휘하면서 정치적으로 성장해 온 것이 사실이다.
자신의 수하가 대장동 사업의 실무 책임자로 구속되었음에도 그는 태연자약하게 ‘국민의 힘 게이트’라고 맞대응하면서 대장동 사태의 프레임을 토건 비리 세력 게이트로 돌리는 데에 일정 부분 성공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국정감사와 향후 본격적으로 전개될 대선 과정에서도 후흑(厚黑)의 무공을 갖추고 현란한 기교를 발휘하는 이 지사가 더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아 대권레이스의 최종 승자가 될 수 있다. 야권에서는 국민의 힘 홍준표 후보가 상대적으로 후흑학을 가장 잘 이해하는 후보로 보인다. 대선후보는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바로 사과해서는 안 되고 거짓말을 주저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대선은 몇 달 후면 끝나고, 승리하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 게다가 우리 편에 대해서는 특별히 관대한 것이 상식 아닌가.
그러니 이 지사를 비롯한 여야 대선후보들도 걱정하지 말고 본격 레이스가 시작되기 전에 얼굴을 더 두껍게 하고 흑심을 더 깊게 하는 후훅무공을 단기간에 더 습득해서 절체절명의 ‘후흑경쟁’을 벌여줄 것을 기대한다.
이번 대선은 후흑의 기교를 관전하면서 국민들이 대선주자들의 후흑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지켜보는 또 다른 재미가 추가될 것 같다.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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