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트로이전쟁이 끝난 후 표류와 유랑을 거듭한 끝에 10년만에 고향 이타케로 돌아갔다. 로마시대 서사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주인공인 트로이의 패장 아이네아스는 7년 동안 떠돈 끝에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해서 정착한다.
서사시에 등장하는 유랑 설화들이다. 그렇지만 현실세계에서는 더 가혹한 유랑이 무수히 많았다. 중세 이탈리아의 시성 단테 알리기에리는 고국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고 20년동안 떠돌다가 객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중국 춘추시대 진(晉)나라 헌공(獻公)의 아들 공자 중이(重耳)도 18년동안 동가식서가숙하다가 고국에 돌아가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대우건설도 이들 설화와 역사의 주인공만큼이나 기나긴 유랑을 겪어야 했다. 유랑은 1999년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시작됐다. 당시 (주)대우가 워크아웃에 들어가고 2000년에 건설부문만 대우건설로 따로 분리됐고, 2006년 금호그룹에 인수됐다. 금호그룹은 자금여력도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차지했다가 2008년 세계금융위기가 일어나자 다시 내놓았다.
지난 2017년에는 호반건설이 인수하는가 싶더니 막판에 틀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9일 중흥건설이 산업은행과 대우건설 최종 인수계약을 맺었다. 정말로 파란만장한 여정이었다. 오디세우스나 단테보다 더 험한 세월을 보낸 것 같다. 표면적으로 대우건설의 유랑이 이제 마침표를 찍은 것 같다.
그런데 중흥그룹의 이번 인수에 대해 새우가 고래를 삼킨다는 평가가 흔히 제기된다. 그런 평가가 무리는 아니다. 이를테면 시공능력을 봐도 대우건설은 5위에 올라 있는 반면 중흥건설그룹은 10위권에서 멀리 있다.
과거에도 이번처럼 작은 기업이 큰 기업을 인수했다가 실패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그렇기에 중흥건설의 대우건설 인수에 대해서도 걱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이번에는 같은 건설업종의 기업이 인수했다는 것이 다행이다.
그러나 우려의 요인은 더 근본적인 문제에 있다. 대우건설을 인수한 중흥그룹의 경영이 투명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 2일 내놓은 재벌 지배구조 현황 자료에 따르면 중흥그룹의 정창선 회장과 2세인 정원주 부회장이 모두 11개 계열사의 미등기임원을 맡고 있다. 대기업집단 가운데 가장 많다.
미등기임원은 등기임원으로서의 책임을 회피하고 뒤에 숨는 자리라는 지적을 받는다. 재벌기업의 불투명경영을 상징하는 유력한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중흥그룹의 경우 기업규모에 비해서도 미등기임원의 비율이 너무 높다. 이 때문에 신뢰성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산업은행이 대우건설을 중흥건설에 넘기기로 했을 때 이런 사실을 제대로 짚어봤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을 것 같다. 제대로 파악했다면 중흥그룹에 대우건설을 넘기겠다는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굳이 중흥그룹에 매각하고 싶었으면 투명경영을 위한 선행조치로서 미등기임원 문제를 정리하라고 중흥그룹에 요구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요구를 제기했다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대우건설이 과거에 불우해진 것은 한마디로 대우그룹과 금호그룹의 무모하고 불투명한 경영 탓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투명하지 않은 작은 재벌에 넘긴다는 것은 사실 모험 아닌가 여겨진다.
계약까지 다 체결한 마당에 이같은 우려를 제기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라도 산업은행은 어떤 형태로든 중흥건설의 투명경영을 유도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의 기업결합 심사 과정도 남아 있다. 그러니 의지만 있다면 공정위와 함께 대우건설의 투명경영을 담보할 있는 방안을 찾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대우건설은 더 이상 유랑해서는 안된다.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말고, 세계적인 건설기업으로서 더욱 도약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합리적이고도 투명한 경영이 선행돼야 한다. 특히 중흥그룹이 총수일가의 미등기임원 문제를 스스로 우선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산업은행과 공정거래위원회가 맡아야 할 책임과 역할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차기태 언론인(folium@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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