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이 있냐'며 팬티만 입게 한 뒤 몸을 훑어보고 여러 사람 보는 앞에서 수치심을 줬다. 찍히기 싫어서 얘기 못 했다. 한이 맺히고 가슴이 아프다."
최근 국내 철강기업 세아베스틸에서 근무하던 36세 남성 노동자 A씨가 상사들로부터 지속적인 성추행과 괴롭힘을 당하다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계약직으로 입사한 6년차 직원 A씨는 정규직이 된 후 승진을 앞두고 있었다.
남겨진 영상과 유서에 따르면 A씨는 입사 후 야유회에서 발가벗은 채 기념사진을 찍어야 했고, 상사들이 성기를 만지고 볼 뽀뽀를 해도 참아야 했다.
이에 앞서 한 대기업 디자이너의 안타까운 죽음 소식도 알려졌다. 회사 연구소 디자인센터에서 일했던 B씨는 업무 과다와 상사의 폭언을 견디다 못해 2020년 극단적 선택을 했다.
B씨 역시 팀장급인 책임연구원으로 승진했지만 신 제품 발표를 8일 앞두고 숨을 거뒀다. B씨의 아내는 "(남편이) 내가 죽으면 묘비명에 죽어라 일만 하다가 죽었다고 써달라는 거다. 큰 애가 그 얘기를 듣고 막 엄청 울었다"고 말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시행한 지 2년 반이 지났지만 우리 주변에선 여전히 안타까운 죽음이 끊이질 않고 있다. 법 시행 초반에는 조심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다. 하지만 근무환경에 변화가 있는 정도는 아닌 듯 하다.
이 때문에 법을 도입했지만 효과가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해도 가해자가 처벌받는 건 쉽지 않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실이 고용노동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직장 내 괴롭힘 신고 건수는 전년보다 16% 급증했지만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된 건수는 0.45%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됐다. 1000건 신고하면 4~5건 정도 기소의견으로 송치되는 셈이다.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기준이 모호해 실제 처벌까지 잘 이어지지 않는 걸로 보인다. 바꿔 생각하면 법으로 직장 내 갑질을 근절하는 건 한계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결국 직장 내 괴롭힘을 끊어내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기업문화에 있다. 회사가 상사의 폭언이나 성추행을 먼저 알아보고 조치를 했다면, 애당초 과로를 할 수 없게 하는 제도적 장치가 있었다면, 직장 내 괴롭힘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했다면 안타까운 죽음은 막았을지도 모른다. 직원의 죽음이 드러난 후에 부랴부랴 하는 사과나 책임자 사퇴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보다 못한 일이다.
직장은 한 사람이 성인이 된 후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지옥과 다를 바 없다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닐 거다. 근무 환경이 행복하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끔찍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지만 문화는 바꿀 수 있다. 법으로 사회를 바꾸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기업문화를 바꾸는 건 그보단 덜 걸릴 수 있다.
새해엔 부디 먹고 살기 위해 간 직장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안타까운 일은 없었으면 한다.
김지영 산업1부 기자 wldud91422@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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