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신상민 기자] 한때 한국 영화 시장을 두고 작품의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말이 많았다. 관객이 찾는 작품, 소위 돈이 되는 작품만을 만들다 보니 다양한 장르, 독특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의 제작 기회가 부족했다. 그럼에도 영화 시장은 드라마 시장에 비해서는 어느 정도 다양성이 확보된 곳이다.
드라마 시장은 다양성이 더욱 부족한 곳이다. 한국 드라마를 두고 모든 장르의 결말은 로맨스라고 할 정도로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에만 집중되어 있다. 스릴러 장르, 사극, 현대극 등 어떤 장르가 됐든 남녀 주인공의 러브스토리가 주가 된다.
이러한 시장 논리 속에서 OTT 시장의 활성화는 특정 주류 장르만 돈이 된다는 고정관념을 깼다. 그 대표적인 장르가 ‘BL’이다. ‘BL’은 ‘보이즈 러브’의 줄임말로 남성 간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소설, 만화 등을 통칭하는 장르다. BL은 과거 음지 문화, 일부 마니아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에는 웹툰, 웹소설을 넘어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장르로 확대됐다.
BL 장르는 남성간의 사랑을 그리고 있지만 쿼어 영화와는 조금 다르다. 쿼어 영화가 성소수자들이 겪는 편견이나 혐오를 주로 다루는 반면 BL 장르는 남자 주인공들의 사랑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왓챠 '시맨틱 에러' 포스터. (사진=왓챠)
왓챠는 국내 OTT 시리즈 중 최초로 동성애 코드를 전면에 내세운 ‘시맨틱 에러’를 선보였다. ‘시맨틱 에러’는 동명의 인기 BL 웹소설, 웹툰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시맨틱 에러’는 컴퓨터공학과 추상우(재찬 분)와 갑작스레 그의 일상에 등장한 시각디자인과 장재영(박서함 분)의 캠퍼스 로맨스를 그리고 있다. ‘시맨틱 에러’는 7주 연속 왓챠 시청 순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Seezn ‘소년비행’ 역시 최근 주목 받고 있는 작품이다. ‘소년비행’은 부모에게 마약 운반 수단으로 이용당하는 18살 소녀가 새로 만난 친구들과 함께 대마밭을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청소년을 내세운, 소위 청춘 드라마의 경우 방송 매체에서는 이들의 범죄를 크게 부각시키지 않는다. 심각한 문제의 학교 폭력, 사이버블링 등의 문제도 가볍게 다루는데 그친다. 더구나 지상파 방송에서는 청소년의 마약 문제 등은 아예 다루지 않고 있다.
하지만 넷플릭스에서 선보인 ‘인간수업’ ‘소년심판’ 등은 최근 사회적으로 문제가 심각한 청소년 범죄의 심각성을 제대로 담아냈다. ‘소년비행’ 역시 청소년 범죄와 이를 방임한 사회의 문제점을 꼬집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작품과 궤를 같이 한다. 이처럼 지상파 등에서는 제작 자체를 생각하지 않았던 청소년 범죄, 마약 등의 소재를 담은 비주류 장르가 OTT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적극적으로 제작되고 있다.
넷플릭스 '지금 우리 학교는' '고요의 바다' 포스터. (사진=넷플릭스)
과거만 해도 B급 장르로 취급 받던 좀비 장르는 최근에는 누구도 B급 장르라고 여기지 않는다. 국내 영화 시장에서는 그나마 좀비물이 제작이 되고 있지만 여전히 드라마 시장에서는 찬밥 신세다. 그나마 좀비를 내세운 드라마는 KBS 드라마 ‘좀비탐정’이 유일하다. 하지만 OTT 시장에서는 좀비 장르 드라마가 활발히 제작되고 있다. 최근에는 ‘지금 우리 학교는’이 넷플릭스에서 공개돼 많은 사랑을 받았다.
국내에서 유독 비주류 취급을 받는 SF 장르, 크리처물도 OTT 시장을 통해서 제작의 기회를 얻고 있다. 넷플릭스 ‘고요의 바다’ ‘스위트 홈’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한 대중문화 평론가는 “OTT 시장은 콘텐츠를 지속해서 소비해줄 타깃 시청층의 취향 확보가 필요하다.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를 겨냥한 지상파 방식보다는 확실한 취향을 가진 특정 장르의 마니아층의 니즈를 확실하게 공략해 한다”고 밝혔다.
또한 “왓챠만 보더라도 BL 장르 마니아층의 유입이 눈에 띄게 늘었다. 왓챠에 가면 BL 장르 드라마를 볼 수 있다는 인식이 생기며 제작사 입장에서도 다른 OTT보다 왓챠를 찾게 될 것이다. 결국 다양해진 OTT 시장에서 주류가 아닌 비주류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는 “동성애 장르 자체가 비주류라는 인식이 크다. 영화 시장에서도 투자를 받기 어려운 장르인데 드라마 시장에서 투자를 받아내기란 하늘의 별따기다”며 “더구나 동성애 드라마를 지상파, 케이블, 종편에 편성한다고 하면 자녀를 둔 부모, 종교계 등 온갖 곳에서 항의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하지만 OTT 시장에서는 그런 부분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최근엔 OTT가 다양해지고 수많은 웹드라마가 쌓이면서 여러 취향을 반영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BL 장르 역시도 나름 두터운 마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다. 골수 팬들 입장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 작품이 드라마화 되는 것을 반길 수 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시맨틱 에러’와 같이 비주류 장르임에도 7주 연속 1위를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록이 제작사에게 BL 장르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근거가 돼 추가 제작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드라마 블루밍 포스터. (사진=NEW)
실제 콘텐츠미디어그룹 NEW는 웹툰 ‘인기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 ‘블루밍’을 지난달 31일 네이버 시리즈온과 IPTV에 동시 공개했다. 이어 BL 소재 웹드라마를 추가로 제작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하나 같이 국내 웹툰, 웹소설 시장을 기반으로 한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다. 네이버 웹툰, 카카오 웹툰 등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 팬 층을 형성하고 있다. 이미 다양한 나라에서 인기를 검증 받은 스토리라는 점에서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OTT 시장의 활성화가 주류 장르, 비주류 장르의 경계를 무너트렸다.
신상민 기자 lmez0810@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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