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효선 기자] 윤석열 정부 첫 대법관으로 지명된 오석준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준이 늦어지면서 대법원의 고심이 커지고 있다. 대법관 공석 사태 속 ‘미쓰비시중공업 국내재산 매각 명령 재항고’ 등 수백 건의 사건 처리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일 퇴임한 김재형 전 대법관이 주심을 맡았던 ‘미쓰비시 국내재산 매각 명령 재항고 사건’은 그의 후임으로 제청된 오 후보자가 맡게 될 가능성이 크다. 대법원에 따르면, 대법관 소부 구성이 바뀌지 않는 한 오 후보자가 대법관으로 임명되면 김 전 대법관 자리를 이어받아 대법원 소부 3부 대법관이 되고 그때부터 이 사건을 원점부터 다시 들여다 봐야 하는 상황이다.
22일 현재, 여야는 지난 8월30일 인사청문회를 마친 오 후보자에 대한 임명 동의안 처리를 23일째 미루고 있다. 10월로 접어들면서 국정감사 시즌이 시작되기 때문에 동의안 처리에 대한 기약도 사실상 불투명하다. 이러는 동안 '미쓰비시 사건'에 대한 심리는 열리지 않고 있다. 매달 열렸던 전원합의체 판단도 잠정 중단됐다.
대법원 재판은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을 제외한 12명의 대법관이 3개 소부에 4명씩 배치돼 사건을 심리하는 구조다. 각 소부에서 심리하는 사건은 대법관 1명이 주심을 맡고 나머지 3명과 합의를 통해 결론을 내는데, 김 전 대법관이 빠진 대법원 소부 3부는 당장 사건을 심리·판단할 1명의 대법관이 부족한 상황이다.
대법원에 따르면 대법원 3부에서 김 전 대법관이 주심을 맡은 사건은 330건(퇴임일 기준)이 넘고, ‘미쓰비시 사건’과 같은 재항고 사건까지 포함하면 처리해야 할 사건 수는 1600건에 달한다.
대법원의 한 재판연구관은 “(오 후보자 임명이) 너무 늦어지고 있다”며 “지금까지 적체된 사건뿐 아니라 대법원에 사건이 계속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라, 오늘 당장 (오 후보자를) 대법관 임명한다 해도 (3부에서) 살펴볼 사건이 수백 건이다. 쌓인 사건들을 다 보는 데만 한 달 이상이 걸릴 수밖에 없어 현 상황이 답답하다”고 우려했다.
재판연구관 출신 한 변호사는 “안 그래도 (대법원에 쌓이는) 상고사건이 상당해서 대법원에 과부화가 걸릴 지경일텐데 (대법관) 인선 때마다 (여야 대치로 인해) 이런 상황이 지겹도록 반복되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미쓰비시중공업 근로정신대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가 박진 외교부 장관에게 쓴 편지. 양 할머니의 손편지에는 ‘돈 때문이라면 진작 포기했다. 나는 일본에서 사죄받기 전에는 죽어도 죽지 못하겠다.(중략)미쓰비시가 사죄하고 돈(배상금)도 내놓아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출처=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김 전 대법관 퇴임 전 ‘미쓰비시 사건’에 대한 사법 판단을 막은 외교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에 따르면 외교부는 지난 7월 말 미쓰비시 국내재산 강제매각을 위한 최종 결정만을 남긴 대법원에 “우리 정부가 강제징용 문제의 합리적 해결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다각적 외교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해달라”는 내용의 의견서를 제출했다.
판단을 미뤄달라는 이 같은 외교부 요청에 미쓰비시 측이 특허권 특별현금화 명령에 불복해 낸 재항고 사건의 대법원 심리불속행(심리 없이 바로 상고를 기각하는 제도) 결정은 미뤄졌다. 심리불속행 결정을 내릴 수 있던 지난달 19일 대법원이 약식으로 미쓰비시 측 재항고 기각 결정을 내렸더라면 즉시 미쓰비시의 국내재산 매각을 통한 ‘현금화’가 확정될 수 있었다.
김 전 대법관은 법원을 떠나던 날 퇴임사에서 “입법이나 정치의 영역에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한 사안인데도 법원의 문을 두드리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며 “입법으로 해결해야 할 모든 문제를 사법부가 나서서 해결하려고 해서도 안 되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고 밝혔다. 이는 외교적 파장을 고려해달라는 정부 등의 입김에 녹록치 않은 대법원 상황을 말한 것으로 해석된다.
대법원 판단이 미뤄지며 윤석열 정부는 외교적 협의에 필요한 시간을 벌었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 미쓰비시 등으로 피해를 입은 사건 당사자들은 어느새 90세 이상의 고령자가 됐다.
연내 결론이 어렵다는 관측이 나오면서 피해자 측은 답답하다는 입장이다. 미쓰비시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등을 대리하는 김정희 변호사(법무법인 '라포')는 “(피해자 중)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 많다”며 “일본전범기업 강제동원 사건은 피해자 중심으로 바라봐야 하는데, 정작 국가는 피해자 분들을 배척한 채 외교 문제를 들먹인다. 이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 변호사는 “(미쓰비시 재항고 사건 판단이 해를 넘길) 가능성은 있겠지만 심리불속행이라는 게 사실관계를 따지거나 법률의 해석을 따지는 게 아니라 이미 확정된 판결로 인한 강제집행을 하는데 있어 무슨 하자가 있느냐를 쟁점으로 해서 판단하는 것”이라며 “별다른 하자가 보이지 않아 바로 기각할 수 있는 사안임에도 이런 사안(심리불속행)을 결정하는데 시간을 끄는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심리불속행 결정은) 해를 넘겨야 할 만큼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 아닌데도 (결정이 늦어진 것은) 대법원이 외교부 의견서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앞서 대법원은 2018년 11월 미쓰비시의 불법행위를 인정하며 피해자들에게 1인당 1억~1억5000만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미쓰비시는 한국의 대법 확정 판결을 외면하고, 지난 4월 되레 특허권 현금화명령에 불복, 재항고했다.
미쓰비시 측의 계속된 항고, 재항고 등으로 10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며 지연손해금 역시 계속 쌓이고 있다. 대법원 판단이 해를 넘기더라도 심리불속행 기각 결정이 내려지면 이자·지연손해금이 더 늘어나 미쓰비시는 피해자들에게 1인당 2억원이 훌쩍 넘는 위자료를 내야할 것으로 추산된다.
역사정의와 평화로운 한일관계를 위한 공동행동이 지난달 25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미쓰비시에 대한 대법원의 신속한 강제집행 결정' 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박효선 기자 twinseve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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