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정부 지원=신약개발' 공식은 억지
2022-10-23 06:00:00 2022-10-23 06:00:00
커다란 호수 옆에 한 마을이 있다고 가정하자. 어느 날 큰 비가 내렸다. 비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주민들은 범람하는 호수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망연자실할 때 한 청년이 둑을 세워 마을을 지키겠다고 나섰다. 주민들은 없는 살림에도 먹을거리며 옷가지를 내줬고 청년의 땀방울도 정직했지만, 둑은 끝내 지어지지 않았다. 호수 물이 쉴 새 없이 넘쳐 손을 쓸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 청년은 주변 사람들에게 받은 음식과 옷을 토해내야 할까. 왜 둑을 짓지 못했냐는 질책을 받아야 할까. 그럴 리가. 비가 거세 물이 넘쳤는데 사람을 탓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2022년의 마지막 계절이 찾아온 한국의 상황은 다르다. 정부 지원금을 받아놓고도 코로나19 치료제나 백신을 개발하지 못한 기업을 책망한다. 지원금을 먹고 내뺐다는 '먹튀' 비난도 더러 나온다. 흡사 정부 돈을 가져다 썼으면 무조건 결과물을 가져와야 한다는 말로도 해석된다. 지원금 반환을 둘러싼 사실관계는 차치하더라도 코로나19 대응 수단 개발에 실패하면 잘못된 일일까.
 
코로나19 치료제와 백신을 포함해 신약을 하나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짧아야 10년이다. 최소 10년간 들어가는 돈은 수천억원을 웃돈다. 모든 후보물질이 신약으로 탄생하는 것도 아니다. 신약개발 성공 확률은 높게 잡아야 10% 안팎이다. 실험 단계에서 빛을 보지 못하거나 임상시험 과정을 거치면서 폐기되는 물질까지 묶으면 신약개발 성공률은 더 내려간다.
 
이렇게 보면 신약의 탄생은 이상적이지만 당연하진 않다. 오히려 개발 실패를 당연하게 보는 편이 낫다.
 
두 달쯤 전에 인터뷰로 만났던 신약개발 전문가는 신약개발의 실패를 성과로 인식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이름만 들어도 알법한 글로벌 제약사의 한 직원은 100여명이 모인 회의 장소에서 자신이 맡고 있던 신약 프로젝트 중단을 요청했다. 아직 초기 임상 단계지만 성공 가능성이 희박해 개발을 멈춰야 한다는 요지였다. 직원의 말을 들은 최고 의사결정권자는 일어서 박수를 쳤다. 그리고는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했을 때 생기는 비용을 직원과 소속 부서에 지급하라고 지시했다. 무리해서 임상을 끌고 갔으면 손실이 뻔한데, 그 돈을 아껴준 데 대한 포상이었다.
 
물론 제약 선진국에서 수십년간 생존한 기업이니 신약개발 실패를 당연하게 여길 수 있다. 이제 막 성장가도를 달리는 우리나라에서 같은 문화가 정착되길 바라는 것은 시기상조다. 세계 시장에서 내노라하는 상위 기업을 경험한 국내 기업 소수가 최근 들어 이런 인식을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여전히 신약개발 실패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다 하더라도 실패한 코로나19 치료제·백신 개발이 도둑질처럼 취급돼선 안 된다. 국민 세금을 들여 기업의 연구개발을 지원했는데 성과가 나오지 않으니 세금이 낭비됐다는 주장은 산업에 대한 몰이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적어도 산업 특성을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실패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정부 지원이 곧 신약개발 성공이라는 허무맹랑한 공식은 버려야 한다.
 
산업2부 동지훈 기자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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