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섬 제주에서 바티칸까지-34)고독이 그대를 정화시켜줄지리라!
2022-12-29 14:10:42 2022-12-29 14:10:42
서구 열강들이 경쟁적으로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대륙, 아시아의 모든 국가를 식민지로 삼던 시대에 스스로 독립을 지킨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더구나 같은 아시아 국가에 나라를 빼앗겼다는 치욕적 과거를 가진 국가의 국민으로서 태국이 어떻게 독립을 지켜 왔을까 하는 의문도 있어 이번 여정에 자주와 독립의 배경이 된 저력의 실체의 일부라도 엿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눈부신 금빛 사원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정글, 원초적인 모습 그대로의 에메랄드빛 해변, 맵고 자극적인 음식, 그리고 그것보다 더 자극적인 밤 문화, 태국은 나를 비롯해 많은 외국인들에게 가장 묘한 매력을 가지고 알 수 없는 추파를 던지는 나라이다. 베트남 국경을 넘어서 캄보디아를 23일 간 횡단해서 도착한 나라이다. 여기부터는 차량지원을 못 받고 바티칸까지 가야한다. 그야말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손수레를 밀고 가야한다.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했어야 했다. 그게 나다운 거였다. 그러나 한편 두려웠다. 두려움의 구름이 장마철 먹구름처럼 나를 휘감았다. 뇌경색 후유증으로 조금만 기온이 떨어지면 손발이 차가왔고, 길 위에서 마주칠 각종 위험과 때때로 노숙도 감수해야 하는 게 두려웠다. 저녁노을처럼 가장 찬란한 고독을 찾아 나선 초로의 남자의 운명을 스스로 거부한 결과는 무관심이었다. 스스로 세계를 무대로 전위예술을 펼친다고 떠벌였던 호기는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불꽃같은 삶을 찾아 온 열사의 나라들을 헤매다 지친 다리를 질질 끌고, 허기진 배를 움켜잡아도 후회란 없다. 한번 마음먹은 길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쉼 없이 달려가지만 잘못된 길인 것을 알고는 냉정하게 돌아서 나오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늘 먼 곳을 바라보고 망상에 잠겼었던 남자. 자존심을 굽히고 비굴하게 처신하느니 지옥의 불길을 선택하는 남자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멀고 험한 두려움과 고독의 길이다.
 
예정된 편안한 길은 없다지만 무미건조한 삶보다는 들판의 자유와 미래의 희망을 더 갈망하는 남자가 기꺼이 선택하는 길이다. 뜨거운 태양의 광휘(光輝)만이 내 고독과 좌절을 어루만져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천 길 물속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어렵다고 한다. 운명의 원조라고 부르는 오이디푸스마저도 ‘나는 누구인가?’ 무릎 꿇고 처절하게 물었다. 나는 철저한 고독 속에서 반복해서 ‘나는 누구인가?’ 무릎 꿇고 처절하게 물었다.
 
고독은 흙탕물의 황토와 같은 것이다. 흙탕물은 보기에는 더러워 보이지만 의외로 그 물 속에는 1급수에서만 사는 어종들이 많이 산다. 황토가 물을 정화시켜주는 작용을 할 뿐 아니라 유기물이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니 마음의 심난한 자(者)들이여, 고독을 찾아 떠나라! 그래서 고독은 현대인들에게 제 3의 가치라고 하지 않았던가? 고독이 당신의 마음을 정화시켜줄 뿐 아니라 당신의 마음의 유기물을 가득 채워줄 것이다.
 
집을 떠난 자 금방 집의 안락함을 그리워하고, 집에 있는 자 햇살의 밝음과 빈 들판의 자유로운 바람을 그리워한다. 그러니 그리움과 후회는 어쩌면 인간에게 운명인지 모르겠다. 홀로 되고나니 진정한 들판의 바람과 같은 자유로움을 느끼는 순간 한 무리의 거대한 기러기 떼가 바로 머리 위를 날아가고 있다. 순간 카메라를 잡고 비번을 누르고 잡 동작을 하는 사이에 기러기 떼는 북쪽을 향해 덧없이 날아가 버렸다.
 
육체적인 고통을 견뎌내면서, 시시때때도 들이닥치는 위험에 대처하고, 정신적인 번뇌를 밀어내고, 고독으로 내면의 샘물을 정화시키며, 인내하는 자학적인 면에서 종교의 수도자들이나 나의 달리는 행위는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의식하지는 않지만 달리면서 나는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을 실행한다. 그렇다고 내가 영적으로 심오해졌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반복 동작을 계속 이어가고 있고 어떤 운명 같은 것이 나를 밀고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달리기는 피하려하면 할수록 나를 휘어 감는 운명적인 사랑과도 같아서 한계가 왔을 때 그것을 훌쩍 뛰어넘게 해주는 힘을 주었다. 사랑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다. 그것이 내가 불편한 몸이지만 불편할 뿐 불구는 아니라고 우기면서 광야에 뛰쳐나와‘평화의 노래’를 목이 메어 부를 수 있는 원동력이다.
 
남북통일이야말로 지나간 옛사랑을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저녁 사랑하는 님의 마음을 얻을 때까지 달빛 창가에서 목이 터져라 세레나데를 불러서라도 기필코 이루고야 말 운명적인 사랑이다.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나가지 않으면 강대국의 예속을 벗어날 수가 없다. 강대국의 군산복합체는 정부 위에 있는 신전과 같이 의회의 의원들의 선거자금을 대주면서 주술를 걸어 떠받쳐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역사적 전환기에 서있다. 남북이‘상호 협조’하여 자주독립과 평화를 위한 절차를 하나씩 밟아나가야겠다. 남북의 ‘단결’을 위해서는 지금껏 없었던 ‘집단지성’과 ‘결단’이 필요하다. 그 집단지성을 발휘하게 될 동기가 필요한데 내 고독한 달리기가 트리거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오랜 기간 분단되어 서로 이질적인 것들을 한군데 넣고 버무려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담대한 도전을 남북통일을 통해 추진해 나가야할 것이다. 남북통일이야말로 이 시대의 최고의 과제이기도 하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고 화합하고 때론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은 덮어가면서 따뜻한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는 것이다. 그 불멸의 사랑을 위하여 휴전선의 철조망을 걷어내고 수백만, 수백만 빨간 장미를 장식하며 평화를 구애해보는 것은 어떨까?
 
휴전선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아온 우리가 얼마나 답답증에 걸려 병이 됐을까? 그것이 병이 되어 이렇게 광인처럼 광야에 나와 실성한 사람처럼 ‘통일의 노래’를 부르고 ‘평화’를 소리 높여 외친다. 삼면은 바다로 둘러싸였고 나머지 한 면마저도 가시철조망이 가로막혀 넓은 세상으로 맘껏 뻗어가지 못하는 한반도의 모습은 자궁 속 아기처럼 잔득 웅크린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고구려 발해의 멸망 이후 천 년 만에 역사적 대전환기의 태양이 떠오르는데 우리의 운명을 다시 강대국들의 군산복합체의 교묘하고 교활한 논리에 맡겨버리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면 우리 후손들은 과연 우리를 용서할 것인가? 냉철하게 세계정세를 바라보고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을 해야 한다. 지금의 어려움을 우리 온 겨레의 집단지성으로 극복하고 상생 평화의 시대를 활짝 열 때이다.
 
위험을 감수하고 담대한 도전과 모험을 통하여 ‘평화의 노래’를 부를 때는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긴장감과 함께 몰입감을 주어 담론을 끌어내는데 성공적이었다. 그렇다! 버티기 힘든 목마름과 배고픔, 고독과 두려움을 견디고야 최후의 아름다움을 품에 안고 아버지의 고향이자 나의 뿌리를 찾을 기회가 올 것이다.
 
강명구 평화마라토너가 평화달리기 85일차인 지난 24일 태국의 한 마을에서 만난 주민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강명구 평화마라토너)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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