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음악계의 에베레스트, 축음기 모양의 트로피(그라모폰·Gramophone)를 들어올리는 고유의 상징성.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한국 대중음악 분야 최초로 3년 연속 수상 불발에 그친 그래미는 세계 음악계 최고 권위로 꼽힙니다.
올해 핵심이 된 키워드는 다양성. 역사 상 첫 그라모폰을 들어올린 트렌스젠더 뮤지션이 나왔으며, 할머니 팬이 직접 무대까지 올라 수상을 지켜보는 이례적인 풍경도 연출됐습니다. 지난해에 이은 비밀 위원회 철폐와 레코딩 아카데미 회원들의 파격적 수상자 선정 행보.
그래미의 대대적인 변화 흐름에서 K팝은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일까. 평단에서는 "(그래미 특유의) 보수성도 인정하지만, 결과적으로 치열한 수상 경쟁을 뚫으려면 그래미 기준에 부합하는 음악성과 예술성도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최근 몇년 새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6일(한국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크립토닷컴 아레나에서 개최된 제 65회 그래미어워드 시상식에서 선보인 올해 힙합 50주년 무대. 사진=AP/뉴시스
'철옹성' 그래미…보수적인 선정 방식
1958년 시작된 그래미 어워드는 미국 레코드 예술 과학 아카데미(National Academy of Recording Arts & Science, ‘NARAS’)에서 주최하는 음악상입니다. 빌보드 뮤직 어워즈(1990년 시작),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1974년 시작)와 함께 미국 3대 음악 시상식으로 꼽히지만, 세 시상식 중 음악성, 역사적 측면에서 가장 큰 권위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타 음악 시상식과 비교해 지독하리만치 보수적인 선정방식을 고수합니다. 한 해 동안 차트를 휩쓴 가수도 그래미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무관 뿐 아니라 후보에 오르지도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
대중 투표 방식으로 전환한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 빌보드 차트 성과를 기반으로 두는 빌보드 뮤직 어워즈와는 기준 자체가 다릅니다.
차트 성적이나 음반 판매량 등 상업적 성과보다는 음악성과 작품성, 사회적 영향까지 시상에 포괄합니다. 실제로 보수적인 40대 이상 백인 남성이 주 선정위원으로, 실제 회원 가운데 아시아 지역 비중은 10%도 채 되지 않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2017년 세계 최고 팝 디바 비욘세의 '레모네이드'가 영국 출신 백인 가수 아델에게 밀려 수상하지 못하자, 미국 네티즌들은 온라인에 '너무 하얀 그래미상(GRAMMYsSOWHITE)'이라는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로 비판한 사례가 있습니다.
2020년 미국 차트를 휩쓴 위켄드 역시 이 시상식에서 1개의 부문 후보에도 오르지 못하자, 자체 보이콧을 선언해 큰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샘 스미스와 킴 페트라가 '언홀리(Unholy)'로 '베스트 듀오/그룹' 부문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특히 페트라는 트렌스젠더 최초로 그래미 사상 첫 수상의 영예를 안은 기록도 썼다. 사진=AP/뉴시스
일부 변화는 허용…역사 상 첫 트렌스젠더 수상
그나마 최근 몇 년 간 위원단 변화와 수상 결과는 그래미 역시 이러한 비판을 어느 정도 수용하고 변화를 꾀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음의 방증입니다. 실제로 지난해부터 기존 비밀 위원회를 철폐하고 레코딩 아카데미 회원 중심의 수상 행보를 보이면서, 의외의 인물들이 최종 수상을 하는 분위기입니다.
올해 1999년생 신예 사마라 조이는 모네스킨, 아니타, 무니 롱 등의 화제성에서 뛰어난 음악가들을 제치고 주요 부문(제너럴 필즈) 중 하나인 '올해의 신인'을 차지했습니다. 밴드 '웻 레그'는 뷔욕, 빅 시프, 예 예 예스, 아케이드 파이어 같은 기존 그래미의 단골 손님들을 제치고 베스트 얼터너티브 앨범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샘 스미스와 킴 페트라스는 올해 '베스트 듀오/그룹' 부문에서 방탄소년단(BTS)과 콜드플레이를 제치고 수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특히 킴 페트라스는 역사 상 첫 그라모폰을 들어올린 트렌스젠더 뮤지션이 됐습니다.
그간 엘튼 존 전성기 때 성소수자임에도 상을 몰아주는가 하면, 아르카, 테디 가이거, 재키 셰인 같은 트렌스젠더 음악가들을 후보에 올려온 '소수자와 다양성'을 아울러온 행보가 올해 정점을 찍은 것으로 보입니다.
팝의 아이콘 마돈나는 샘 스미스와 킴 페트라스 합동 무대에 앞서 "논쟁을 일으키고 구설수에 휘말릴 준비가 됐냐"며 "그것은 달리 말하면 자기 안에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모든 비평 위로 아주 아름답고 신선하게 올라 선 이 두 사람을 주목하라"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는 “그래미의 경우, 보수적인 성향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맞지만, 오히려 그럼으로써 권위와 화제성을 이어가는 측면도 있는 게 사실”이라며 “음악성 뿐 아니라 시대의 변화까지 아우르는 최종 이벤트라는 시각에서 사상 첫 트렌스젠더 수상까지 나온 게 아닌가 싶다”고 봤습니다.
올해의 주인공이었던 해리 스타일스. 주요 부문(제너럴 필드) 중에서도 최고 영예로 꼽히는 ‘올해의 앨범’을 비롯해 '베스트 팝 보컬 앨범', '엔지니어드 앨범-비 클래식 부문' 등 총 3관왕에 올랐다. 사진=AP/뉴시스
젠더리스 패션과 바디 포지티브…"음악 세상 바꿀 수 있어"
해리 스타일스는 올해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주요 부문(제너럴 필드) 중에서도 최고 영예로 꼽히는 ‘올해의 앨범’을 비롯해 '베스트 팝 보컬 앨범', '엔지니어드 앨범-비 클래식 부문' 등 총 3관왕에 올랐습니다.
젠더리스 패션으로 무대에 오르는가 하면, 시상 때 소셜미디어 상에서 유명해진 할머니 팬을 무대로 올려 함께 주먹을 맞부딪히는 장면도 보였습니다.
‘올해의 레코드’ 수상을 한 리조는 "2016년 세상을 떠났을 때 긍정적인 음악을 만드는 데 인생을 바칠 것을 다짐했다"며 "이 상을 가수 프린스에게 바치고 싶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몸 또한 어떤 형태건 사랑하고 긍정하자"며 바디 포지티브 메시지로 다양성에 대한 가치도 일깨웠습니다.
질 바이든 미국 영부인이 무대에 올라 아랍권의 히잡 여성들의 자유와 해방에 대한 목소리에도 동참했습니다.
셔빈 하지푸르라는 신예 가수가 소셜미디어 상에서 관련 노래를 내고 흥행한 것을 지지한 바이든 영부인은 "음악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전 세계에 임팩트를 줬던 음악가를 기릴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하지푸르는 올해 신설된 '송 포 소셜 체인지' 부문 첫 수상자가 됐습니다.
흑인 여성 비욘세는 32번째 그라모폰을 들어 올리며, 그래미 사상 최다 수상 역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이대화 대중음악평론가는 "올해 그래미는 다양성이 화두이었던 것 같다"며 "'빅사이즈' 사람들에게 당당하라는 리조의 메시지, 트랜스젠더 최초의 그래미 수상, 힙합 50주년 공연과 신규 투표 인단들 추가 같은 지점들에서 미국 내 변화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습니다.
흑인 여성 비욘세는 32번째 그라모폰을 들어 올리며, 그래미 사상 최다 수상 역사를 썼다. 사진=AP/뉴시스
BTS, 3년 연속 수상 불발…미디어 과열 현상도 자제해야
BTS는 올해 3개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모두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결과를 두고 올 한 해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점과 향후 입대 문제로 완전체 활동이 잠정 중단된 상황의 고려까지 더하면, 예상을 크게 빗나가진 않았다는 게 음악 평단의 대체적 관점입니다.
이대화 대중음악평론가(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는 "많은 분들이 BTS 수상 예상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마이 유니버스'의 경우, 시장과 영향력 등의 측면에서 보면 과거 빌보드 핫100 7주 1위에 올랐던 '버터'에 비해 임팩트가 약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짚었습니다.
일각에선 BTS의 후보 지명과 무대가 최근 3~4년 새 지속적으로 이어져오고 있는 만큼, 그래미가 서서히 빗장을 푸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지만, 아직까지 K팝의 음악성, 예술성을 인정했다 보긴 어렵다는 의견도 우세합니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는 "기본적으로 미국 시장에 초점을 맞춘 시상식이기 때문에 미국의 기준에서 봐야하는 것이 맞는데, 자꾸 한국 내의 위상을 근거로 미디어들이 '과대망상'을 쏟아내는 것이 큰 문제"라며 "과거 노벨 문학상 발표 때마다 한국 취재진들이 국내 시인의 집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양상과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지난해 불발 당시 임진모 대중음악 평론가 역시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BTS 음악이 미국 차트와 시장에선 엄청난 두각을 나타냈지만, 그래미가 통상적으로 요구하는 음악성과 예술성은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짚은 바 있습니다.
최근에는 '소셜 파워를 지닌 아티스트면 무조건 높은 평점'을 부여하는 일부 해외 매체의 객관성도 지적됩니다. 이대화 대중음악평론가는 "(그래미 이야기는 아니지만) 해외 매체나 언론에서 K팝을 다루는 방식도 요즘에는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며 "K팝 아티스트라면 높은 평점을 부여하고 소개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그것이 꼭 객관적이고 적절한 평가인 것인지에 의문이 생기는 지점이 있다"고 짚었습니다.
BTS가 그래미와 연을 맺은 것은 지난 2019년 시상식부터입니다. 멤버들은 당시 'R&B 앨범' 부문을 시상하러 무대에 올랐습니다. 이후 2020년 시상식에서는 래퍼 릴 나스 엑스(Lil Nas X)와 합동 공연을, 2021년에는 히트곡 '다이너마이트'로 '베스트 팝 듀오/그룹 퍼포먼스' 부문에 이름을 올리며, 한국 대중음악 가수 최초로 그래미 어워즈 후보로 기록됐습니다. 지난해에도 '버터' 단독 무대와 수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지난해 '그래미어워즈' 단독 무대를 꾸몄던 그룹 방탄소년단(BTS). 사진=뉴시스/AP
이날 수상 불발에 따라, 향후 BTS로서 그래미에 또 다시 도전하게 될 시점은 2025년 이후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간 대중음악 부문 이외 그래미 클래식 분야에서는 이미 한국인 수상자가 나온 바 있습니다.
1993년 제35회 시상식에서 소프라노 조수미가 지휘자 게오르그 솔티와 녹음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그림자 없는 여인'이 그해 클래식 오페라 부문 '최고 음반상(Best Opera Recording)'에 선정됐습니다. 음반 엔지니어인 황병준 사운드미러코리아 대표는 2차례나 수상의 이력이 있습니다. 2021년에는 한국계 미국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최우수 클래식 기악 독주 부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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