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지난 16일 공개된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 데모 판은 철 지난 만우절 농담 같았습니다. 정식판 출시를 한 달 앞두고 나온 데모는 세계지도(안타리아 대륙) 구름의 조잡한 표현과 컷신·전투의 낮은 그래픽 품질, 주인공의 초필살기 연출 시 화면이 뚝뚝 끊기는 현상, 모험 모드에서 장비 변경과 회복 아이템 사용 불가, 전투 시 일일이 '이동' 버튼을 눌러야 하는 불편함 등 총체적 난국으로 기존 팬들에게 지탄받았습니다.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 안타리아 대륙 위에 흐르는 구름. 사진 왼쪽부터 체험판과 데이 원 패치 적용판. 이하 라인게임즈 제공 영상을 편집함. (사진=라인게임즈)
체면 구긴 데모 판
그럴 만했습니다. 회색의 잔영 원작인 '창세기전'은 1990년대 한국 롤플레잉 게임 역사를 연 1세대 명작입니다. 1995년 12월 소프트맥스가 발매한 1편은 김진 만화가의 삽화와 캐릭터, 비극적인 서사와 방대한 분량으로 수많은 팬을 양산했습니다. 미완성된 후반부 이야기는 이듬해 나온 2편에서 완성돼 지금도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회색의 잔영은 라인게임즈가 2016년 창세기전 IP를 확보하고 리메이크 개발도 발표한 지 7년 만에 나온 기대작입니다. 원작 1~2편을 합친 42개 장에 언리얼 엔진4 그래픽 적용, 성우진의 전체 대사 녹음 등으로 80시간 분량이 담겼습니다.
하지만 라인게임즈는 올해 2월 기준 개발판을 출시 직전인 11월에 데모로 공개해 체면을 구겼습니다.
이에 라인게임즈는 자사가 출시하고 레그스튜디오가 개발하는 이 게임의 '데이 원 패치'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데이 원 패치는 게임 출시 첫날 제공하는 패치입니다. 보통 최적화와 그래픽 품질 향상, 게임성 개선, 버그 해결 등이 담겨 있습니다. 패키지 게임인 회색의 잔영은 12월22일 닌텐도 스위치로 출시됩니다.
실제로 얼마나 나아졌는지 살피고자 저는 지난 28일 레그스튜디오에서 데이 원 패치판을 한 시간 경험해봤는데요. 전반적인 그래픽 향상과 편의성 개선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에서 팬드래건의 왕녀 이올린이 초필살기를 쓰는 모습. 사진 왼쪽부터 체험판과 데이 원 패치 적용판. (사진=라인게임즈)
광원 효과·편의성 개선
우선 기존 데모 판에서 지적된 저품질 구름 문제는 해결됐습니다. 게임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조작법도 개선됐습니다. 데모 판의 모험 모드에선 불가능했던 장비 착용과 회복 아이템 사용이 가능해졌습니다. 전투 직후는 물론 세계 지도로 나왔을 때도 자동 회복이 적용됐습니다.
데모에선 전투에 돌입했을 때 캐릭터를 누른 뒤 '이동' 버튼을 눌러야 움직일 수 있었지만, 이제는 캐릭터를 누른 다음 바로 이동할 곳을 누르면 됩니다.
선택지에서 '스킬'을 눌러야 기본 공격을 할 수 있던 점도 개선됐습니다. 이젠 기본 공격과 스킬 선택지가 나뉘기 때문이죠.
이 밖에 서사를 펴는 주요 장면에서 색감 개선과 광원 효과 추가, 투박한 사물에 고해상도 이미지가 뒤늦게 덧씌워지는 '텍스처 팝인' 현상도 개선됐습니다. 이와 함께 컷신과 전투 때의 처리 지연 문제가 상당 부분 해결된 모습이었습니다.
마장기 '아수라'가 발견되는 장면. 사진 왼쪽부터 체험판과 데이 원 패치 적용판. (사진=라인게임즈)
그래픽 옵션 제공 예정
이 때문에 출시 한 달을 앞두고 2월 기준 데모를 공개한 라인게임즈의 행보가 아쉬웠습니다. 우선 완성본 디스크를 공장에 넘기는 '골드 행(Goes Gold)'이 9월 말~10월 초에 끝난 상태에서 발매 코앞에 하자 많은 데모를 내놔 원성을 샀습니다. 사용자 의견을 반영해 정식판 준비에 반영하는 기간을 훌쩍 넘긴 겁니다. 차라리 데이 원 패치 내용만 공개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제작사도 이 점을 뼈아픈 실수로 생각합니다. 레그스튜디오에 따르면, 먼저 만든 고품질 그래픽을 임시로 저품질로 낮춰두고 전반적인 최적화 방법을 찾아왔습니다. 지금은 데모 판 이전에 만들어 둔 고품질 그래픽으로 돌려놓고 안정적인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게 개발팀 설명입니다.
레그스튜디오는 지금도 최적화와 광원 효과 개선 작업 등을 이어가고 있는데요. 데이 원 패치에선 그래픽 품질 선택지를 표준·선명함·보정 등 세 단계로 나눠 제공합니다. 실제 출시 때는 선명함과 보정 선택지만 남길 수도 있습니다. 닌텐도 스위치를 TV에 연결하는 독 모드와 휴대 모드에 별도 그래픽 품질 선택지를 넣을지는 검토 중입니다.
출시 직전까지 고삐를 쥐어야 할 부분도 보였습니다. 이날 라인게임즈가 제공한 개선판 구동 영상을 보면, 자국의 독립을 위해 저항군을 이끄는 왕녀 '이올린 팬드래건'의 초필살기 사용 장면은 색감과 광원 효과가 나아졌습니다. 하지만 화면 출력이 '부드럽다'는 느낌을 주기엔 여전히 부족했습니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등장인물의 공격이 점차 화려해질 것이란 점을 감안할 때 개선이 시급해 보였습니다. 레그스튜디오는 데이 원 패치 이후에도 후속 패치를 이어갈 계획입니다.
게임은 그래픽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지만 회색의 잔영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사람들의 기대를 온전히 충족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1996년 2편 출시 당시 첨단을 달렸던 원작과 달리, 이제는 외형은 물론 게임성도 평범해졌다는 평가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과거 원작 '창세기전2'를 했던 게임업계 관계자는 "창세기전 출시 당시 일본 게임이 기술적으로 훨씬 앞섰던 게 사실이었지만, 당시 개발사인 소프트맥스가 그 시대적 격차를 엄청나게 빠르게 따라잡았던 기억이 난다"며 "그래픽뿐 아니라 음향과 UI(사용 환경)도 '오 이거 일본게임 같다'라고 생각한 기억이 난다"고 돌아봤습니다.
이어 "창세기전2는 출시 당시 다른 국내 작품에서 보기 힘들었던 3D 그래픽이 적용되는 등 첨단 기술이 총집약됐는데, 회색의 잔영 데모판은 현시대 기준으로 그래픽과 게임성이 평범한 모습을 보여줘, 서사밖에 내세울 게 없는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걱정이 앞선다"고 덧붙였습니다.
오스킬 강에서 이올린이 전투하는 모습. 사진 왼쪽부터 체험판과 데이 원 패치 적용판. (사진=라인게임즈)
걱정 반 기대 반
출시 후 더 나아지는 모습을 지켜보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또 다른 게임업계 관계자는 "이 작품은 그래픽과 시스템만 혹평받았지, 스토리에 대한 불평은 들어본 적이 없다"며 "스토리에 문제가 있다면 싹 뜯어고쳐야 하지만, 시스템과 그래픽은 개선하면 되므로 앞으로 나아질 여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개발팀은 창세기전 IP 활용작의 지속 가능성을 결정할 이 작품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원작에서 기술의 한계로 대사나 설명문으로 대충 넘긴 장면을 모두 컷신으로 살려냈습니다. '창세기전3'부터 도입됐던 성우 연기 녹음이 1~2편 리메이크작인 회색의 잔영에 처음 도입된 점도 기대할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색의 잔영 데이 원 패치 내용은 2023년 기준으로는 평범한 게임에 속합니다. 이를 강력한 서사의 힘으로 보완해 새로운 팬을 확보할 수 있을지, 회색의 잔영이 창세기전 IP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을지는 12월22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나볏 테크지식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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