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 기자] 대규모 기업집단 내 상속세를 해결하기 위해 상속 지분 일부를 팔거나 우호지분과 교환하는 등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과정은 순탄치 않습니다. 총수일가의 주식 처분은 오버행 이슈를 낳고 있습니다. 한미그룹과 OCI그룹 통합 사례는 현물출자가 포함된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활용했는데 정합성 문제 지적도 나옵니다.
16일 법조계 및 재계 등에 따르면 제3자 배정 유상증자는 신주를 배정받는 특정 주주 외 기존 다른 주주를 배제하는 배타적 방식으로 주주평등 원칙에 반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에 따라 상법은 기업 경영상 목적에 한해서만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습니다.
두 그룹은 사업 포트폴리오 및 경쟁력 강화 차원이라고 제3자 배정 유상증자 목적을 설명했습니다. 석유, 화학 전문 기업에서 제약바이오 기업으로 성장한 바이엘처럼 통합 시너지를 내겠다는 설명입니다.
하지만 재계에선 이번 통합 배경을 상속세 부담 해소 및 지배력 강화 차원의 우호지분 확보로 해석합니다. 당초 한미그룹은 창업주 별세 후 5000억원 넘는 상속세 납부를 위해 지분 매각을 타진해왔다는 관측입니다. 만일 상속세 납부를 통한 지분 희석으로 경영권 방어가 힘들어질 것이 배경이었다면 제3자 배정 유상증자는 적법하지 않습니다.
2009년 1월30일 경영진의 경영권이나 지배권 방어 목적으로 제3자에게 신주를 배정한 경우 신주발행이 무효라고 판단한 대법원 판례가 있습니다. 대법원은 “경영진의 경영권이나 지배권 방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제3자에게 신주를 배정하는 것은 상법 제418조 제2항을 위반해 주주의 신주인수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판시했습니다.
과거 한화종금의 경영권 분쟁 사건에서는 경영권 방어를 위해 기존 주주를 배제한 채 제3자인 우호세력에게 집중적으로 신주를 배정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환사채를 발행한 것이 무효라고 법원은 판단했습니다(서울고등법원 판례).
제3자에게 신주발행 시 일부 주주에게만 우월한 권리나 이익을 부여하기로 한 경우에도 무효가 될 수 있습니다. 2018년 9월13일 재판에서 제3자 배정 유상증자에 참가했던 자들 중 투자계약상 수익금보장 약정이 있었던 사건을 다뤘는데 법원은 주주평등 원칙에 반한다고 봤습니다. 주주평등 원칙이란 주주는 회사와의 법률관계에서는 그가 가진 주식 수에 따라 평등한 취급을 받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대법원은 “이를 위반해 회사가 일부 주주에게만 우월한 권리나 이익을 부여하기로 한 약정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무효”라고 판결했습니다.
한미그룹 내 고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 장남 임종윤 사장과 차남 임종훈 사장은 이번 주식 거래를 사전에 몰랐다고 해 경영권 분쟁 소지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만약 법적 분쟁으로 간다면 제3자배정 유상증자의 정합성을 다툴 것으로 보입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논란 있는 거래라고 생각은 되지만 형식상 시너지 등을 내세우고 있어 법적으로 문제 삼기는 어려워 보인다”며 “다만 두 집안이 향후에도 협력적 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을지 경영권 분쟁이 발생할지는 두고볼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넥슨의 상속 주식 물납과 삼성 일가족의 전자 주식 매각 등 재계에서 상속세 파장이 이어집니다.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은 지난 15일 삼성전자 주식 2조1689억원어치를 시간 외 매각(블록딜)했습니다. 또 이부진 사장은 삼성전자 외 삼성물산, 삼성SDS, 삼성생명 주식 일부도 시간 외 매각해 일가족이 판 삼성그룹주는 총 2조8000억원 규모입니다.
세 모녀는 이재용 회장과 함께 고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에 대해 12조원 이상의 상속세를 5년에 걸쳐(2026년까지) 연부연납할 예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그룹 총수인 이 회장만 빼고 세 모녀가 계열사 주식을 지속 팔아왔습니다. 삼성물산의 경우 지배구조상 최상단 지배회사로 경영권 방어 목적 때문에 오버행은 피해갈 것으로 예상됐지만 이번 블록딜 명단에 올랐습니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의 주식 매각과 한미-OCI 통합 사례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며 “상속 지분 희석 이슈로 갈수록 지분 승계가 어려워지면서 유사 사례도 늘어날 듯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이재영 기자 leealiv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고재인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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