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은 국가가 필요할 때 군말없이 죽어주도록 훈련되는 존재.' 처음엔 눈을 의심했습니다.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이 지난 10일 경북경찰청에 낸 탄원서에 적힌 문구입니다. 임 전 사단장은 해병대 채상병 순직 사건으로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무슨 대륙 침략에 혈안이 된 태평양전쟁 시절 미쳐 날뛰는 일본군 구호도 아니고, 버젓이 21세기 민주군대를 자처하는 대한민국 군대 '투스타'가 병사를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귀신 잡는 해병대'의 사단장이 '귀신 들린' 줄 알았습니다.
병사는 국가가 필요할 때 죽는 존재 '아냐'
징병제 국가에서 그저 '국방의 의무'라는 이름으로 전투복을 입은 스무살 청춘들에게 국가가 필요할 때 군말 없이 죽으라니요. 채상병은 급류가 휘몰아치는 강물에 국가가 필요로 해서 들어간 것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국가는 아직 피어나지도 못한 청춘을 강물에 들어가 군말 없이 죽으라고 하진 않았을 듯 싶습니다.
채상병은 국민개병제를 명시한 헌법 제39조1항(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에 따라 입대했습니다. 소방관인 아버지를 둔 채상병은 어머니가 37세의 나이로 얻게 된 귀한 늦둥이 외아들이지만, 부모 반대를 무릅쓰고 해병대에 자원입대했습니다. 해병은 어차피 가야 할 군대가 아니라 자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기왕 하는 군인,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이 컸을 겁니다.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이 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의 채상병 특검법 입법청문회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군말 없는 죽음' 강조한 '장군님의 군말'
'군말 없는 죽음'을 강조하는 '장군님'은 군말이 많습니다. 21일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채상병 특검법 입법청문회'에서 임 전 사단장은 증인선서를 거부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선서는 '진실과 책임'에 대한 서약입니다. 그런데 선서는 거부하되 증언은 하겠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겁니다.
앞서 경찰에 제출한 탄원서에서도 "군의 특수성을 고려해 부하들을 선처해 달라"고 하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말귀 못 알아먹은 부하들 잘못이지, 내 책임은 없다'입니다.
그는 탄원서에서 "포11대대장이 포병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욕에서 작전 대상 지역을 자의적으로 확대한 지침을 전파한 것"이라며 "포7대대장은 지침을 오해해 부하들에게 하천 본류까지 들어가 작전하도록 지시한 것"을 원인으로 지목했습니다.
12일 서울 용산역 광장에 마련된 얼차려를 받던 중 사망한 육군 12사단 신병교육대 훈련병의 추모분향소에서 한 시민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가족·친구·사랑하는 사람 위해 '목숨 바쳐'
아무리 대한민국 군대가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군대는 군대'입니다. 생전 한 번 마주칠 일도 없는 사람들이 '상관'이라는 명칭과 계급장을 앞세워 왕노릇하면서 군림하는 곳입니다. 그래도 국가가 부여한 의무이기 때문에 청춘들은 참고, 또 참으면서 버팁니다.
징집병으로 군대 갔다 온 사람이라면 다 압니다. 국가가 필요해서 죽는 게 아니라, 내 가족과 친구,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언제라도 군말 없이 죽기 위해 훈련하는 겁니다. 국가와 계급장 높으신 '장교님'들이 부른다고 목숨을 내놓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귀신도 잡는다는 부대의 수장이 패망 직전 일본군 수준의 군인관을 갖고 있으니, 대한민국 군대의 장교들은 육군·해병 가릴 것 없이 병사들을 '죽어도 되는 존재'라고 여기면서 너나없이 보고 배우나 봅니다.
군문에 몸을 들인 지 며칠도 채 되지 않은 박모 훈련병에게 규정에도 없는 완전군장으로 군기훈련을 시켜 사망에 이르게 한 육군 12사단 중대장(대위)도 있습니다. 임 전 사단장보다는 나이는 적고 계급도 낮지만, 병사를 손톱의 때만도 못하게 여기는 '군인정신'은 무척이나 닮았습니다.
육군 12시단 신병교육대 강모 중대장과 부중대장(중위)은 21일 구속됐습니다. 춘천지법의 신동일 영장전담 판사는 구속영장을 발부하면서 "피의자가 피의사실과 같은 죄를 범했다고 의심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고, 증거 인멸 우려가 있어 구속 필요성이 인정된다"고 했습니다.
오승주 공동체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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