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보이지 않는 두려움 vs. 봐야 하는 두려움
2024-12-12 06:00:00 2024-12-12 06:00:00
“뭐? 계엄? 어느 나라에서?”
 
한밤중에 난데없이 계엄이라는 두 글자를 들었을 때 나의 첫 질문은 이것이었다. 해외뉴스인 줄만 알았다. 그 다음 나온 말이 “2024년에?”였는지 “가짜뉴스 아니야?”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살면서 확신이 드는 것 하나는 ‘절대’라는 말을 웬만해선 쓸 수 없다는 점이다. 남에게 일어나는 일은 언제든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으며, 인간이 욕망에 의해 작동하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한 역사는 항상 반복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사실은 너무도 쉽게 그리고 자주 망각된다. 그리고 망각의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처참하다.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사람들은 하나 둘 시력을 잃는다. 원인 모를 전염병이 도시를 시나브로 집어삼킨다. 초기 발병자들을 격리시킨 수용소에서 눈이 먼 사람들은 서로를 연민하며 기본적인 질서를 수립해 나간다. 그러나 그 질서는 총을 소유한 한 사람이 나타나면서 가볍게 무너진다. 음식을 독점하기 위해서다. 생존 앞에서 사람들은 무법의 독재자에게 무릎을 꿇는다. 시력을 잃지 않은 유일한 사람인 의사아내(줄리안 무어 분)조차 그렇다. 수용소라는 세계에서는 ‘보인다는 것’이 총보다 더 큰 무기가 될 수 있는데도 일거에 그를 제압하지 못하고 복종한다. 절망은 그토록 무서운 것이다. 눈뜬 사람도 장님을 만드는 게 바로 그 절망이다.
 
지금 우리는 절망하고 있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로 굳건히 뿌리내렸다고 믿었던 민주주의가 위협당한 충격은 우리를 절망에 빠뜨렸는가. 물론 그렇다. 그런데 충격의 원인제공자와 절망의 그것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국회의 빠른 대응으로 충격은 점점 가시고 있지만 절망은 오히려 깊어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장관의 모교인 충암고를 향한 공격이 도를 넘고 있다. 재학생들을 향해 폭언하고 취업에 영향을 주겠다며 협박하는 일까지 일어난다. 학생들은 두려움에 떨며 교복 대신 일상복을 입어야 하는 상황이고, 교사와 교직원들도 욕설과 모욕에 시달리고 있다. 집회에 참가했던 2030 여성들을 향한 성희롱적 발언, 상대적으로 수적 열세를 보인 청년 남성들에 대한 비난, 청년층들의 시위방식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심지어 정치적 발언을 하는 연예인들에게 입장이 다른 이들의 인신공격성 막말도 난무한다. 
 
모두 비이성적이고 부당한 폭력이다. 물론 몰지각하고 몰상식한 일부 사람들의 얘기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국민의 들끓는 분노가 이해되기도 한다. 우리 사회의 차별과 혐오는 이미 묵은 과제라서 새로울 것 없는 현상으로 넘길 법도 하다. 
 
“우리는 눈이 멀어버린 게 아니라 보지 않는 것이다.”
 
영화 속 감염자들과 다르지 않았던 의사아내를 생각하면 이 말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감염의 여부는 기실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보여도 보이지 않는 자와 다를 게 없다면 말이다. 나아가 어떤 것들은 눈을 감아야만 보이기도 한다. 정작 중요한 것들이야말로 더 그렇다. 
 
극한 상황에서 인간성은 민낯을 드러내지만 인간성의 민낯을 회복할 절호의 기회로 극한 상황만큼 좋은 때도 없다. 다만 그 회복은 상황 탓을 하며 상황을 핑계 삼아 민낯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들을 제대로 구별해야 가능해진다. 분노는 또 다른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될 수 없다. 
 
‘눈이 보이는 나는 무엇을 깨달은 걸까?’
 
영화말미에 스스로에게 물었던 의사아내의 이 질문이 지금의 우리 자신에게도 꼭 필요하다. 망가진, 그리고 망가지고 있는 이 세상을 보는 게 눈이 먼 것보다 더 두렵지 않으려면 말이다. 
 
이승연 작가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지난 뉴스레터 보기 구독하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