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강승혁 기자] 국내 주식시장이 혼란한 틈을 타 '투전판'을 방불케 하는 테마주 거래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런 종목 거래에 돈을 빌려주는 증권사들은 이들 테마주의 신용거래를 사실상 방치하고 있습니다. 주가가 단기간 급등한 종목에 대해 한국거래소가 내리는 '투자경고' 조치도 무용한 탓입니다.
이재명주 에이텍, 거래량 4분의 1이 '빚투'
11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테마주로 꼽히는 에이텍은 지난 5일 기준 신용공여율이 25.27%에 달했습니다. 이 종목의 전체 거래량 중 4분의 1 이상이 빚 내서 투자하는 신용거래였다는 뜻입니다. 이날 이후 거래소는 에이텍에 대해 투자경고, 매매거래가 정지될 수 있다고 순차적으로 예고했습니다. 그럼에도 지난 9일 신용 신규수량이 월중 최고치인 63만2241주 발생했습니다.
에이텍은 이달 4일부터 20% 이상 급등세를 이어왔습니다. 거래소는 에이텍에 주가가 크게 변동할 만한 사유가 있는지 묻는 조회공시를 요구했으나, 에이텍 측은 "주요 종속회사인 에이텍컴퓨터의 타법인주식 및 출자증권 양도를 검토 중에 있다"는 답변만 공시했습니다. 투기성 투자가 몰려든 원인과는 무관한 질의응답으로, 공시를 본 투자자들에게 실질적인 정보를 주는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에이텍' 종목토론방 현황. 정치적 이슈를 주가 변동 사유로 거론하는 투자자들이 대다수다. (사진=네이버페이 증권 캡처)
한동훈 테마주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상홀딩스의 신용공여율은 올해 들어 10~20%대를 꾸준히 기록하고 있으며 지난 9월 25일에는 41.65%에 이르렀습니다. 이 종목의 주가는 지난 4일 상한가를 기록한 다음날 12.72% 하락하는 등 높은 등락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투자 시점에 따라 단 하루만에 자산가치 10분의 1이 사라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KB, 신한투자증권을 비롯한 증권사들은 대상홀딩스에 대한 신용거래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신용거래는 증권사들의 핵심 수입원인 브로커리지(위탁매매), 대출과 직결됐습니다. 수급이 몰리는 종목에 신용거래를 막는 건 손실을 일정 부분 감내한다는 뜻입니다. 키움증권의 경우 지난 6일 태양금속, 오리엔트정공, 홈센타홀딩스를 현금으로만 거래 가능한 위탁증거금 100% 징수 종목으로 지정했습니다. 그러나 개인투자자들에게 특히 위험성 높은 테마주 투자를 억제하는 것에 대해 전체 증권업계의 공감대는 부족한 실정입니다.
금융당국, 테마주 위험투자 방치
금융감독당국과 증권사는 테마주 매매와 관련한 뚜렷한 제한 조치에 나서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파악됩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정치 테마주에 대한 모니터링은 상시 실시하고 있다"며 "상황에 따라서 그에 대한 우려가 높아진다면 투자자 유의사항 등 대응 계획을 발표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KB증권 관계자는 "테마주를 비롯한 신용 종목들에 대해 변동성과 공시를 다 확인해보고 수시로 모니터링하면서 필요 시마다 조치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표=뉴스토마토)
정치 테마주는 일반 종목에 비해 영업실적이 저조해 테마가 지나가면 수급도 크게 감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23년 3분기 정치 테마주의 평균 영업이익률은 6.5%로 시장지수 일반종목(10.1%)에 비해 3.6%포인트 뒤처졌습니다.
홍준표 테마주인 홈센타홀딩스는 배당 관련한 공시를 번복해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된 바 있습니다. 회계 오류로 이익잉여금이 마이너스로 바뀌며 배당가능이익이 없어진 까닭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투심이 좋아지기 어려운 상황인데도 이달 10일 신용 신규수량이 3만6904주 발생했습니다.
선거철만 되면 정치 테마주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2007년에 4대강 관련주가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2012년 대선 당시에는 테마주에 투자한 개인투자자의 손실이 1조5000억원 이상에 달할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이러한 '불나방 투자'는 올해 더욱 두드러지는 양상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대통령 당선으로 예상되는 강달러에 비상계엄 사태로 국내 주식시장이 침체한 가운데 머니게임이 펼쳐진 일부 테마주로 수급이 쏠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코스피·코스닥 시장의 거래 상위 종목을 보면 일성건설, 이스타코는 물론 안철수 테마주로 분류되는 써니전자까지 정치 테마주가 10위권 안에 줄줄이 포진해 있습니다. 특히 일성건설은 11일 오후 1시 20분 기준 거래대금이 1060억원을 돌파해 대형주에 필적합니다. 각 종목의 토론방에는 "상한가 가즈아"를 외치는 투자자, 확인되지 않은 정보 및 리딩방 링크를 공유하는 '꾼'들이 주를 이룹니다.
최근에는 텔레그램 등 SNS를 이용한 허위사실의 생산·유포와 선행매매, 인위적으로 주가를 끌어올리는 시세조종행위 등이 더욱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정치 테마주의 종목별 시가총액은 대부분 1000억원 미만으로 풍문을 악용해 주가상승을 유도하기 쉬운 중소형주에 해당합니다.
익명을 요구한 기업 지배구조 전문가인 한 교수는 <뉴스토마토>와 통화에서 "한국 주식판이 투기장이 된 것은 가격발견 기능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며 "처방은 자본시장을 건전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 핵심은 주가 상승이 소액·지배주주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시스템을 전부 고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재벌 가문의 승계 과정에서 주가 저평가를 만드는 요인인 상속세를 깎아주는 대신, 일반주주 보호를 위한 상법 개정을 받아들이는 대타협을 생각할 수 있다는 조언입니다.
이 교수는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월 상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해놓고 지금은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완전히 후퇴했고, 민주당도 충분히 밀어붙일 수 있는데 안 하고 있다"며 "국가 시스템을 운영하는 공무원들의 인센티브에도 주가 상승이 반영돼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
강승혁 기자 ksh@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의중 금융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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