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싱가포르서 만난 북한 김정은과 미국 트럼프.(사진=연합뉴스)
미국 트럼프정부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에게 연일 대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2기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인 지난 14일(현지시간) 피터 해그세스 국방부 장관 지명자는 "핵보유국으로서 북한의 지위(The DPRK's status as a nuclear power)"라고 말했고, 다음 날 마크 루비오 국무부 장관 지명자는 "어떤 제재도 (핵) 능력을 개발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했다. '대북 제재무용론'과 결을 같이하는 발언으로 읽힌다.
김정은이 가장 듣고 싶은 말 '핵보유국'…그걸 말해준 트럼프
그리고 트럼프는 20일 대통령 취임식 직후 김정은에 대해 "그는 뉴클리어 파워(nuclear power)라고 했다. 북한이 현재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바로 '핵보유국'이다. 그걸 트럼프까지 나서 직접 말해준 것이다. 트럼프는 이란과 비교하면서 김정은을 "그는 종교적 광신자가 아니다. 똑똑한 남자(smart guy)"라고 했다. 협상할 만한 인물이라고 재확인한 셈이다.
이틀 뒤 23일 트럼프는 한 발 더 나갔다. '김정은과 다시 연락을 취해보겠느냐(reach out)'는 질문에 곧바로 "그렇게 할 것"(I will)이라고 답했다. 질문에 대한 답이기는 했지만 북·미 정상외교 시도에 대해 2기 대통령 취임 이후 처음으로 분명하게 직접 입장을 밝힌 것이다. 그러자 곧바로 트럼프가 유엔 북한대표단에 접근해 논의를 시작하라고 지시했거나, 심지어 김정은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을 가능성도 있다"(한반도 전문가인 미국 랜드연구소의 브루스 베넷 선임연구원)는 분석까지 나왔다.
북한은 25일 김정은이 참관한 가운데 전략순항미사일(SLCM)을 시험발사했다. 유엔안보리 제재 대상이자 미국이 예민해하는 중·장거리 탄도미사일이 아닌 순항미사일이었다. 26일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이 발사를 "잠재적인 적수들에 대한 전략적 억제의 효과성을 제고해 나가기 위한 국가 방위력 건설 계획의 일환"이라고 했다. 미국을 직접 거명하지 않고 '잠재적인 적수'라고 에둘러 표현했다. 북한도 탐색전에 나서겠다는 신호로 읽혔다.
이어 트럼프정부에서 각론성 언급까지 나왔다.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은 한·미 연합훈련 계획에 정통한 미 국방부 당국자가 지난 27일(현지시간) 관련 질의에 "재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윤석열 한국 대통령의 탄핵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면서 "올해 한·미 연합훈련은 현재로서는 예정대로 실시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종합하면, 현재까지 한·미 연합훈련 일정에 변화가 없지만 앞으로 트럼프의 판단에 따라 훈련이 중단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한·미 훈련, 달라질 수도"…각론까지 말하는 트럼프정부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비서실장을 지냈고, 트럼프 2기 정권인수위원회에서도 활동한 프레드 플라이츠가 이에 앞서 24일 "북한과 선의의 협상을 할 가능성이 있다면, 협상 과정에서 훈련을 중단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고 한 것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북한이 미국의 '대조선적대시 정책'의 핵심 중 하나로 보는 한·미 연합훈련을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나오게 하는 유인책으로 사용해 보자는 것이다.
지난 2017년 말 남·북, 북·미 간 군사적 갈등이 극도로 고조된 상황에서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한·미 군사훈련을 연기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혀 그다음 해 2월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를 이끌어냈고, 트럼프도 사상 처음으로 미국과 북한 정상이 만난 2018년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 한·미 연합훈련 축소·취소를 결정한 바 있다.
이처럼 트럼프정부에서 대북 협상 유인책까지 거론하는 러브콜이 나오는 가운데, 김정은은 선을 긋고 나섰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이 핵물질 생산기지와 핵무기 연구소를 현지지도한 자리에서 "우리 국가의 핵대응태세를 한계를 모르게 진화시키는 것은 우리가 견지해야 할 확고한 정치군사적 입장이며 변함없는 숭고한 의무이고 본분"이라고 말했다고 29일 보도했다.
김정은 총비서가 핵물질 생산기지와 핵무기연구소를 현지지도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9일 보도했다. (사진=연합뉴스)
공교롭다고 해야 할까? 비슷한 시각에 브라이언 휴스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대변인이 <연합뉴스> 질의에 "트럼프 대통령은 그가 집권 1기 때 그랬던 것처럼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complete denuclearization of North Korea)를 추구할 것"이라고 답했다.2018년 6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합의문에서 북한이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 간의) 판문점 선언을 재확인하면서 북한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공약한다'(Reaffirming the April 27, 2018 Panumunjom Declaration, the DPRK commits to work toward complete denuclerar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고 약속한 사실을 상기한 것이다.
트럼프 등이 북한을 핵보유국이라고 표현하면서 미국과 한국에서는 트럼프정부가 미국에 직접 위협인 ICBM(대륙간탄도미사일)만 제거하는 대신 나머지 북한 핵은 인정하고(동결) 대북 제재를 해제해 주는 '핵군축-스몰 딜'협상에 나서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쏟아졌다. 백악관이 이를 일축한 것이다.
7년 전 북·미 회담, 트럼프 결단…이번엔 김정은이 결정해야 가능
금방이라도 북·미 간 접촉이 시작될 것처럼 뜨거워진 분위기에서 북한과 미국 수뇌부가 찬물을 끼얹은 형국이다.
이 장면은 아무리 트럼프라도 북·미 간 핵협상을 '뒤집기 한 판' 정도로 해치울 수 없음을 보여주는 작은 사례다. 2018년 북·미 정상회담 개최는 트럼프가 결단했으나, 2025년에는 김정은이 결정해야 북·미 정상회담이 가능하다. 김정은은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뒤 2020년에 전략노선을 바꿨다. 내부적으로는 '자력갱생을 통한 정면승부'를, 대외적으로는 대미, 대남 화해정책을 거둬들이고 기수를 북으로 돌렸다. 전통 후원국인 중국에 더해 러시아와 군사동맹 관계를 회복해 확실한 뒷배로 만들었고, 남북관계는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고 이를 완강하게 관철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야, 즉 러시아에게 북한의 전략적 가치가 줄어드는 상황이 돼야 북·미 간 본격 대화의 모멘텀 형성이 가능하고, 그때에도 확실한 인센티브를 트럼프가 내놓지 않으면 대화 그 자체 이상의 성과물은 도출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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