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배덕훈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침묵을 깨고 경영진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질책을 쏟아낸 것을 두고, 그룹을 둘러싼 전방위적 위기 상황을 타개할 근본적 쇄신의 칼을 빼들었다는 관측이 나옵니다. 삼성그룹 내 고위 임원들을 중심으로 ‘올 것이 왔다’는 기류가 읽히는 가운데, 몇몇 임원은 그동안 미뤄진 과감한 혁신이 이제서야 본격 시작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특히 이 회장이 ‘신상필벌’을 거론하며 ‘수시 인사’ 방침도 드러내면서, 그룹의 경영·재무·인사를 틀어쥔 채 막강한 권한을 행사해 온 정현호 사업지원TF장(부회장) 체제에 대한 대수술이 임박했다는 예측도 나옵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사진=연합뉴스)
이 회장의 강경한 메시지가 알려진 지난 17일 전까지 그룹 내부에선 '위기의 삼성'을 타개할 이 회장의 의지나 행동이 보이지 않는다는 불만이 흘러나왔습니다. 안팎의 우려를 느끼고 있던 일부 임원들 사이에서, 이 회장이 전면에 나서 쇄신을 진두지휘해야 한다는 의견이 고개를 들던 차였습니다. 혁신이 더 지체되면 삼성이 소니와 노키아 등의 전철을 밟아 쇠락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의 발로였습니다.
당초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 사건 항소심 무죄 선고 이후, 이 회장이 과감한 그룹 혁신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검찰이 해당 사건에 대해 상고하면서 이 회장의 잠행 경영은 더 이어졌습니다. 그 사이 반도체와 모바일 등 주력 사업분야의 위기 신호는 거듭 반복됐습니다.
죽으려고 하면 살 수 있다는 ‘사즉생’(死卽生) 언급부터 “경영진부터 통렬하게 반성”, “새로운 도전은 없고 현상 유지에 급급하다” 등의 일전에 없던 강하고도 다급한 이 회장의 메시지는 이 과정에서 전격적으로 나왔습니다. 현재 삼성을 둘러싼 위기 상황이 그룹 생존에 위협이 될 정도로 심각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 인식은 각 사업 부문별로 조목조목 질책을 이어간 것에서도 확인됩니다.
삼성 사옥 (사진=연합뉴스)
반도체·모바일·가전 ‘전방위 위기’
실제로 삼성이 직면한 위기는 매우 엄중해 보입니다. 삼성이 자랑하던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초격차 경쟁력’이 무색하게 SK하이닉스와의 고대역폭 메모리(HBM) 경쟁에서 밀린 데다 3위 업체인 마이크론의 거센 추격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엔비디아에 HBM 납품과 관련해 품질 테스트를 아직 통과하지 못하는 등 AI 시대 대응에 실패하면서 그간 자부했던 기술력이 무색해졌습니다. 특히 이 회장이 지난 2019년 2030 1위 선언을 했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분야는 시장 지배자인 대만의 TSMC와의 격차가 더 현격하게 벌어지는 등 경쟁력 저하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모바일 분야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마케팅과 유통력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기술력의 애플과 가격의 샤오미 사이에 낀 형국입니다. 시장조사 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은 삼성이 19%로 애플(18%)을 가까스로 제치고 1위를 지켰습니다. 샤오미는 14% 순으로 격차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여기에 구글과 애플이 양분하고 있는 OS(운영 체제) 패권 하에서 하드웨어만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전락했다는 지적도 여전합니다.
TV 등 가전의 경우도 숙적 LG와 경쟁 속에서 중국이 턱밑까지 추격해 오고 있고, 이차전지도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 장기화에 따른 우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바이오와 금융이 선방하는 모습이지만 각각 시밀러(복제약)와 국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입니다.
이 같은 삼성의 위기는 지표로도 드러납니다. 최근 공시된 삼성전자의 2024년도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D램 시장 점유율은 2023년 42.2%에서 지난해 41.5%로 하락했습니다.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도 지난해 18.3%로 전년(19.7%) 대비 1.4% 감소했고, TV는 30.1%에서 28.3%로 떨어졌습니다.
정현호 삼성전자 사업지원TF팀장(왼쪽). (사진=뉴시스)
질책의 최종 타깃은 ‘정현호’?
결국 이 회장의 질책은 인적 쇄신과 구조개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전망입니다. 이 회장의 메시지 가운데 신상필벌 의지와 인적쇄신을 강조한 대목에 눈길이 가는 이유입니다. 삼성 내부 인사들은 이 회장이 언급한 신상필벌이 결국 정현호 체제를 겨냥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사법리스크로 운신의 폭이 제한적이었던 조건에서 그룹 안정을 위해 정 부회장에게 전권을 주었음에도 그 결과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동안 정 부회장이 이끌고 있는 사업지원TF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줄곧 제기됐습니다. 기존 미래전략실에 버금갈 정도로 사업지원TF에 권력이 집중되면서 현장과의 소통보다는 지시와 명령 체계에 대한 볼멘소리도 적지 않았습니다. 2인자인 정 부회장이 이 회장의 신뢰를 등에 업고 의사결정 자체를 주도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돼 왔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삼성 임원은 <뉴스토마토>에 “2심 선고 이후에도 이 회장이 왜 칼을 못 빼들까 하는 의구심이 커지면서 정 부회장에게 무언가 책을 잡힌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흘러나올 정도였다”며 “뒤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삼성을 뿌리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시스템은 이미 무너졌고, 현장은 수많은 보고 체계와 팀별 책임 미루기가 만연하는 등 1등 삼성이 아니라 패배주의에 젖은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임원은 “이번 이 회장의 질책은 결국 정 회장을 겨냥한 것”이라며 “사법 리스크로부터 해방되기까지 정현호에게 믿고 맡겼지만, 그 결과는 처참했다. 이 회장이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반면, 일각에선 정 부회장이 과거 이건희 회장의 오른팔이었던 이학수 부회장보다 그룹 내 장악력이 더 강하다며 인적 쇄신이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도 나옵니다. 이학수 숙청 과정이 전광석화와 같이 이뤄진 데 반해, 이번에는 그런 주도면밀함이 떨어져 반격의 빌미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배덕훈 기자 paladin70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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