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창경 재테크전문기자] 새해 벽두부터 반도체 대장주들이 증시를 달구며 4400선을 강하게 돌파, 신고가 기록을 새로 썼으나 웃지 못하는 펀드들이 있습니다. 기록 행진의 주인공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담지 않은 펀드 투자자들입니다. 에셋플러스코리아리치투게더, VIP한국형가치투자 등 가치투자 하우스의 대표 펀드들이 반도체 대장주에 투자하지 않은 탓에 지난해 시장 평균을 밑도는 성적을 기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없이도 좋은 성과를 내겠다며 주도주 쏠림에 밀려난 실적 우량주들에 주목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가치투자 대표펀드 체면 구겨
에셋플러스코리아리치투게더펀드는 개인투자자의 신화를 쓴 강방천 회장이 2008년 7월에 선보인 에셋플러스의 대표 펀드입니다. 빼어난 성과를 자랑하며 한때 전체 펀드 중 수익률 1위를 달려 자금이 몰렸으나 지금은 여러 클래스를 모두 더한 설정액이 2200억원 미만입니다. 기관투자자들의 이탈로 설정액은 급감했어도 여전히 스테디셀러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강 회장이 은퇴한 지금은 고태훈 이사와 강 회장의 장남인 강자인 본부장이 에셋플러스 펀드들의 운용을 책임지고 있는데요. 비즈니즈모델(BM)을 중시하며 1등 기업에 투자한다는 철학은 이어가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그 기준에는 들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는 현대로템,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등 방산업체가 편입 비중 1, 2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표 주식형 펀드에 두 종목이 없다 보니 성과가 부진합니다. 코리아리치투게더펀드의 장기 성과는 양호한 편이지만 1년 수익률은 전체 주식형 펀드 중 중간 이하이고 6개월, 3개월 수익률은 하위 10%에 해당합니다. 시장보다 못한 수익률을 기록하면서 투자자도 이탈해 지난해 하반기 펀드 설정액이 눈에 띄게 감소했습니다.
물론 에셋플러스가 반도체 투자에 무관심한 것은 아닙니다. 이 펀드에도 비중 10위 안에 반도체 설계·장비업체 한화비전이 포함돼 있고, 에셋플러스 코리아대장장이액티브 펀드는 가장 많이 담은 종목이 SK하이닉스입니다. 그러나 대표 펀드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수익률에선 체면을 구겼습니다.
VIP한국형가치투자 펀드의 성과는 더 안 좋습니다. 이 펀드는 VIP자산운용이 공모펀드 운용사로 전환한 뒤 내놓은 두 번째 공모펀드이자 첫 번째 개방형 펀드였습니다. 그만큼 펀드 운용에 공을 들였는데요. 2023년 4월 출시 후 2년 동안은 좋은 성과로 주목받았습니다. 그러나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주가에 불이 붙기 시작한 작년 하반기부터 시장과 성과가 벌어지기 시작해 1년 수익률에선 에셋플러스 코리아리치투게더보다 낮은 성과를 기록했습니다. 펀드 설정 후 줄곧 벤치마크보다 높게 유지하던 수익률도 지난 3일 기준가로 역전됐습니다.
이 펀드에 돈을 맡긴 가입자들 중엔 단기 성과에 둔감한 가치투자자들이 많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난해 중반 7000억원을 넘었던 펀드 설정액도 5800억원대로 내려앉은 상황입니다.
(표=뉴스토마토)
신영·한국밸류, 반도체 투자 중
이 밖에 KODEX AI반도체핵심장비, TIGER AI반도체핵심공정 상장지수펀드(ETF)에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없습니다. 누가 봐도 반도체 대장주들이 편입비중 상위에 있을 것 같은 이름인데 반도체 장비에 집중한 ETF라서 D램 제조업체가 아니라 한미반도체 비중이 가장 큽니다.
이들은 기초지수를 만들 때 이미 편입 종목을 결정한 경우라서 앞선 액티브 펀드들과는 사정이 다릅니다. 또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없을 뿐 성과도 매우 좋습니다.
기업가치에 기반한 버텀업(bottom-up) 투자를 우선시하는 가치투자 하우스의 경우 주식시장의 대표성보다 기업가치에 집중하기 때문에 시장을 대표하는 종목들 대신 중소형주를 담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닌데요. 다만 다른 가치투자 펀드 중엔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편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보다 업력이 오래된 국내 대표 가치투자 하우스 신영자산운용은 1조7000억 덩치를 자랑하는 신영밸류고배당 펀드에서 삼성전자 우선주(12.04%)와 보통주(4.26%), SK하이닉스(4.95%)를 모두 1~3위 비중으로 투자 중입니다. 신영마라톤 펀드는 우선주 없이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33.60% 비중을 실었습니다.
또 다른 가치투자 펀드 한국밸류10년투자 펀드도 삼성전자(21.59%), 삼성전자우(3.53%), SK하이닉스(4.10%) 모두 편입했습니다.
이처럼 가치투자를 표방한 펀드들 사이에서도 반도체 대장주에 대한 시각은 엇갈립니다. 이것이 가치주 범주에 대한 기준 차이든 시장 대표 종목이라서 일정 비중을 실은 것이든 각 운용사의 판단이 달랐고 그것이 수익률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반도체 대장주 편입 여부가 달라 수익률 차이는 있을지언정 비교 대상에 올린 펀드들 모두가 최근 1년 수익률에서 벤치마크에 뒤진다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부 주도주가 지수 상승을 이끄는 환경에서는 가치투자 펀드들이 고전할 수밖에 없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주도주 쏠림 다음을 노린다”
다만,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담지 않은 것을 틀렸다고 평가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현시점에서 평가한 성과 부진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시장의 흐름은 계속 변하기 때문입니다.
박영수 VIP자산운용 부사장은 지난해 유튜브에서 VIP한국형가치투자 펀드의 성과 부진에 대해 사과하고 운용 방향을 설명한 적이 있는데요. 그는 “반도체 주식 편입도 고민했지만 이제 와 많이 오른 종목을 투자하는 건 우리가 잘하는 일이 아니다”라고 못박았습니다.
박 부사장은 “과거에도 ‘차화정’(자동차·화학·정유), 반도체 슈퍼사이클, 네카오(네이버·카카오) 등 우리에게 없는 주도주들이 강세일 때마다 비판받았다”라면서도 “이번엔 특히 반도체가 지수 비중이 큰 반도체라서 우리 성과가 더 낮아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주도주가 바뀌면 우리 종목들이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습니다.
그는 또 모두가 한 방향을 얘기하고 있어 우려되는 부분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오픈AI 등에서 나온 초대형 계약은 우리나라 1년 예산의 2배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인데 LOI 형태라서 법적 구속력이 없고, 엔비디아, AMD와 주고받는 형태의 계약을 맺은 것이라며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반도체 다음에 올 넥스트 스텝을 준비하고 있다며 “지난해 9월, 10월에 펀드들이 급하게 삼성전자 등을 채우는 과정에서 다친 종목들이 많이 나왔는데(펀드 보유종목 매도로 인한 주가 하락) 이때 미끄러진 종목에 주목하면 좋을 것이라고 귀띔했습니다.
박 부사장은 반도체 강세는 이어지겠지만 시장은 또 새로운 주도주를 찾을 것이라며 △실적으로 오해를 극복할 수 있는 K뷰티, 패션 △새로운 내러티브가 붙을 수 있는 호텔, 백화점 △반도체 랠리에 관심 밖으로 밀려난 자본시장 개혁 수혜주에 주목할 것을 권했습니다.
김창경 재테크전문기자 ckkim@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고재인 자본시장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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