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창욱 기자] 지난해 국내 철강업계와 석유화학업계는 그야말로 ‘엄혹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미국발 관세 전쟁에 따른 대외 불확실성 확대와 글로벌 수요둔화가 겹치며 실적이 빠르게 악화됐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중국산 저가 물량 공세였습니다. 중국은 낮은 인건비와 대규모 설비를 기반으로 범용 제품을 대량생산 하며 가격경쟁력을 앞세웠고, 이에 국내 철강·석유화학업계는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습니다. 이에 업계는 이를 단순한 경기 사이클상의 불황이 아닌 ‘구조적 불황’으로 규정하기로 했습니다. 범용 제품으로는 중국과의 경쟁을 이어가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업계는 올해를 분수령으로 삼고, 디지털 전환(DX)과 신사업 발굴, 스페셜티 제품 중심으로 포트폴리오 재편을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페르소나 AI가 개발 중인 휴머노이드 로봇 모형 이미지. (사진=포스코DX)
철강, '피지컬 AI' 전환 가속
철강업계는 DX와 신사업을 축으로 한 체질 개선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특히 AI·로봇 기반 스마트 제조와 에너지·친환경 분야로의 확장이 핵심 전략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최근 포스코는 AI 기술과 로봇을 결합한 이른바 ‘피지컬 AI’를 산업 현장에 적용하기 위한 행보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미국 산업용 휴머노이드 로봇 기업 페르소나 AI(Persona AI)에 총 300만달러(약 44억원)를 투자하고, 제철소 고위험 공정에 투입할 휴머노이드 로봇 공동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포스코DX는 제철소의 크레인, 컨베이어벨트, 하역기 등 초대형 설비를 AI로 제어해 작업자 개입 없이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피지컬 AI를 구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해 9월 포항·광양 제철소 제품 야드에 AI가 LiDAR 센서 데이터를 실시간 분석해 크레인 동선을 판단·제어하는 자동 운송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신사업으로는 ‘에너지’를 핵심사업으로 꼽았습니다. 계열사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올해 ‘에너지 부문’을 신설해 액화천연가스(LNG) 밸류체인 통합 운영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기존에는 가스전 개발, 트레이딩, 터미널·발전 사업이 분산 운영됐으나, 이를 통합한 것입니다. 아울러 미국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와 관련, 20년 장기 공급 계약을 체결하는 등 안정적인 연료 확보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현대제철 역시 디지털 전환을 미래 핵심 전략으로 삼고 스마트 제조 기술 확대를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2024년 DX연구개발실을 신설해 전사적 디지털 역량 강화를 본격화했고, 실제로 지난해 12월 당진 특수강 공장에 선재 태깅 로봇을 국내 최초로 도입해 물류·품질 관리 효율을 끌어올렸습니다.
현대제철 ‘선재 태깅 로봇’이 제품에 태그를 부착하는 모습.(사진=현대제철)
친환경 측면에서는 올해부터 전기로·고로 복합 공정(HyECOsteel)을 가동해 기존 대비 탄소 배출량을 약 20% 줄인 저탄소 철강제품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탄소가 덜 발생하는 고품질 철스크랩 활용을 확대하기 위한 국내 고철 처리·재활용 라인을 늘릴 계획입니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AI·로봇 기반 디지털 전환과 저탄소 철강 생산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며 “체질 개선을 통해 중장기 경쟁력을 확보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석화, ‘고부가가치로 재편’ 선포
국내 석유화학업계도 올해를 고부가가치 전환의 ‘원년’으로 설정하고, 범용 제품 ‘탈피’를 선포했습니다. 업계는 전지 소재·고기능성 플라스틱 소재 등을 축으로 사업 구조를 재편하며 전환에 속도를 내는 모습입니다.
특히 롯데케미칼은 올해를 석유화학 범용 중심 사업 구조에서 벗어나는 분기점으로 설정했습니다. 실제로 롯데케미칼은 국내 석유화학사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나프타분해시설(NCC) 감축에 나서 이른바 ‘1호 빅딜’을 성사시킨 바 있습니다.
스페셜티 부문에서는 전지 소재·고기능성 플라스틱·친환경·순환 소재를 축으로 한 포트폴리오 전환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전남 율촌에 연간 50만톤 규모의 엔지니어링플라스틱 공장을 구축해 일부 라인의 상업 생산을 시작했으며, 모빌리티·IT 산업을 겨냥한 고기능성 소재 공급을 확대할 계획입니다.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말레이시아 생산공장. (사진=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전지 소재는 하이엔드 동박과 차세대 배터리 소재를 중심으로 강화하고 있습니다. 최근 AI 가속기용 초극저조도 동박 양산 체제를 구축하며 배터리·AI·반도체용 고부가 소재 공급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수소 분야에서는 울산에서 20MW 규모 수소연료전지 발전소 상업운전을 시작했으며, 대산에서는 450bar 고압 수소출하센터를 가동하는 등 수소 생산·유통 인프라 구축에도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LG화학도 전지 소재·고기능성 플라스틱 등 고부가가치 중심의 포트폴리오 전환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기존 친환경·배터리·신약을 3대 성장동력으로 삼아온 LG화학은 올해 석유화학 고부가 전환을 추가해 4대 성장동력 체계로 확장하기로 하면서, 2030년까지 스페셜티 매출 비중을 25% 수준으로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습니다.
전지 소재 분야에서는 전기차 배터리용 양극재와 음극 바인더, 전지용 접착제 등 차세대 배터리 소재 강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범용 합성고무인 스티렌부타디엔고무(SBR) 설비를 철수하는 대신, 스타이렌 아크릴레이트 라텍스(SAL) 설비로 전환해 접착제·코팅제 및 이차전지용 바인더 등 고부가 스페셜티 소재 생산에 나설 계획입니다.
반도체·전자 분야에서는 고순도 IPA, 반도체 패키징용 소재, 고기능성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을 중심으로 자동차·IT·반도체 산업을 겨냥한 스페셜티 소재 공급을 확대할 방침입니다. 석유화학업계 관계자는 “스페셜티 전환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며 “범용 제품 중심에서 벗어나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으로 체질을 바꿀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두운 전망…“정부 지원 절실”
이처럼 국내 철강·석유화학업계가 사업 구조 개편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업황은 여전히 어두울 것으로 예상됩니다. 구조 전환 과정에서 수익성 개선 효과가 단기간에 나타나기 어렵고, 신사업이 안착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업계는 대응 체력을 확보할 때까지 전기요금 감면 등 현실적인 지원책을 요구하고 있지만, 형평성 논란으로 실현 가능성은 크지 않은 상황입니다. 정부 관계자는 “철강과 석유화학만을 대상으로 한 전기요금 감면은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는 “이미 업계의 스페셜티 전환은 꽤 늦었다고 본다”며 “규제 완화와 더불어 투자를 서두르지 않으면 언제든 중국에 따라잡힐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민동준 연세대 신소재공학과 명예교수도 “중국이 최근 공격적인 구조조정과 산업 고도화에 나선 만큼, 실효성 있는 정책 집행을 위해 업계 목소리가 담긴 시행령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박창욱 기자 pbtkd@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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