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지은 기자] 국내 유료방송이 구조적 한계에 갇히며 사실상 '성장률 제로'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규제와 업계 관행 속에서 상품 구조가 획일화되면서, 요금 할인과 경품 제공 등 제 살 깎아 먹기식 경쟁으로 내몰린 결과입니다. 이로 인해 유료방송사의 수익성 악화와 콘텐츠 대가 지급 여력 감소, 콘텐츠 투자 위축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고착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29일 유료방송업계에 따르면 유료방송 플랫폼 간 상품 차별성은 사실상 사라진 상태입니다. 유료방송에서 송출 중인 채널 현황을 분석한 결과, 2025년 닐슨 유료방송 가입 가구 시청률 상위 150개 채널 가운데 유료방송사별 송출 채널 차이는 7개에 불과했습니다. 송출 채널이 가장 많은 곳은 149개였고, 가장 적은 곳은 142개였습니다. 시청률 상위 100위 채널로 범위를 좁히면 차이는 더욱 줄어듭니다. 사업자 간 최대 격차는 3개 채널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유료방송업계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사업자 경쟁의 핵심은 상품 차별성과 가격인데, 유료방송은 상품 측면에서 사업자 간 차이가 거의 없는 구조"라고 평가했습니다.
이 같은 채널 획일화의 배경으로는 경직된 채널·요금 규제와 복수 방송채널사용사업자(MPP) 중심의 통계약 관행이 꼽힙니다. 유료방송 약관 변경은 형식상 신고제지만, 실제로는 정부 수리가 필요해 사실상 승인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게 업계 설명입니다. 요금제나 약관을 바꾸려 해도 정부가 수리하지 않으면 변경 자체가 불가능해, 시청자가 원하는 대로 방송 채널을 선택해 시청할 수 있는 알라카르테(a la carte) 같은 실험적 요금제는 수년째 도입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존 상품과 가격이나 채널 수가 다를 경우 요금 적정성을 이유로 제동이 걸리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채널 구성 변경 역시 자유롭지 않습니다. 요금 변동이 없는 채널 번호 조정이나 티어 변경조차 정부와의 사전 협의를 거쳐야 하고, 채널 종료 요건이나 개편 횟수·기간 제한 등 세부 조건이 상품 설계를 제약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MPP 통계약 관행도 상품 획일화를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꼽힙니다. 동일 PP 소속 채널이라도 시청자 타깃과 선호도가 다르지만, 현재는 채널 단위가 아닌 PP 단위로 계약이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가령
CJ ENM(035760)의 tvN을 계약하려면 투니버스까지 함께 계약해야 하는 구조인 셈입니다.
상품 차별화가 제한되다 보니 사업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경쟁 수단은 요금 할인과 경품 제공으로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같은 출혈경쟁은 단기적으로 가입자 방어에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플랫폼 전반의 수익성을 빠르게 잠식하는 구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유료방송 산업의 성장세도 사실상 멈춰 섰습니다. 2024년 방송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유료방송 산업의 매출 성장률은 2018년 8.0%에서 2024년 0.05%까지 급락했습니다. 유료방송 플랫폼사의 수익성 악화는 콘텐츠 재원에도 직격탄이 되고 있습니다. 2024년 인터넷(IP)TV·케이블·위성방송 사업자의 방송 프로그램 제작·구매비는 전년 대비 4.6% 감소했습니다.
구조적 한계를 해소하기 위해 유료방송 규제 완화 필요성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최소채널상품과 결합상품에 적용되는 이용요금 승인제를 신고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문제의식을 반영해 김우영 민주당 의원은 유료방송 요금 승인제를 신고제로 전환하는 방송법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승인·변경승인 절차를 삭제해 요금 설계 자율성을 높이고,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와의 비대칭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취지입니다. 김 의원은 "비대칭 규제를 해소해 방송 콘텐츠 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습니다.
채널 계약 구조 개선 필요성도 함께 제기됩니다. PP 단위 통계약 관행 속에서는 유료방송사가 필요한 채널만 선택적으로 계약하기 어렵고, 협상 결렬 시 전체 채널 송출 중단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큽니다. 업계에서는 채널별 계약을 정착시키고, 분쟁 시에도 이용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선계약 후공급' 원칙을 실효성 있게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장기적으로는 유료방송과 OTT를 아우르는 규제 체계로의 전환 필요성도 커지고 있습니다. 유료방송 시장 침체의 배경에는 넷플릭스와 유튜브 등 OTT의 급성장도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OTT는 요금이나 상품 구성에 대한 사전 승인, 채널 편성 규제를 받지 않으면서 전통 유료방송과는 전혀 다른 조건에서 경쟁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규제 비대칭 문제가 누적되면서, 전통 방송과 OTT·유튜브를 포괄하는 새로운 규제 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논의도 본격화되는 분위기입니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 위원장인 최민희 의원 주도로 통합미디어법제 논의가 시작되며, 시청각미디어서비스 개념을 중심으로 한 통합 규제 체계가 공론의 장에 올랐습니다. 유료방송 주무부처인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도 제도 전환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김종철 방미통위 위원장은 최근 신년회 자리에서 "낡은 규제 칸막이를 과감히 허물고, 미래지향적인 통합 미디어 법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밝히며 제도 개편 필요성을 언급했습니다.
전문가들도 규제 완화 필요성에 힘을 싣고 있습니다. 노창희 디지털산업정책연구소장은 "플랫폼이 자율적으로 채널 구성이나 상품을 설계할 수 있도록 채널 편성 규제를 전반적으로 완화할 필요가 있다"며 "유료방송 규제를 완화해 경쟁 환경을 맞추는 방향이 현실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지은 기자 jieune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충범 테크지식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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