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정국이다. 국정은 일찌감치 레임덕 상태로 민생은 뒷전이고, 소위 사회지도층 인사라는 사람 중 상당수가 대선주자 또는 그들의 지인과 친분 쌓기에 매진하는 신비로운(?) 정치의 계절이 한창이다.
번지르르하고 어수선한 선거 분위기를 틈타 우리 사회의 리더라는 사람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즉, 사회지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스럽다.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 정지선
현대백화점(069960) 회장, 정용진
신세계(004170)그룹 부회장, 이승한 홈플러스 회장, 최병렬
이마트(139480) 대표, 노병용 롯데마트 대표,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 등등. 내로라하는 대기업 총수들인 이들이, 성공한 리더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데 이견이 없을 듯 하다.
그러나, 증인출석을 앞두고 굳이 해외로 출장을 떠난 이들 때문에 파행을 겪은 지난달의 국정감사와 청문회 상황을 보니, 필자의 걱정이 기우가 아닌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서 국민들이 바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목숨을 내던져 학살 위기의 국민을 구한 칼레의 시민 대표 6인처럼 거창한 수준은 아닌 듯하다.
시민사회 일원으로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약속과 책임을, 지도층 인사들도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예외 없이, 그저 지키고 다하면 되는 것이다. 세가지 정도만 지킨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첫째로 지켜야 할 것은 `법(法)`이다. 국감 증인 불출석은 명백히 위법이다.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국감·국정조사 증인이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하지 않을 경우 형사처벌 하도록 명시돼 있다. 그런데도 이들은 어쩐 일인지 아무렇지도 않게 출국해버렸고, 허울뿐인 국회는 이 기업인들을 위해 친절하게 추가 청문회를 열었으나 역시, 출석대상자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둘째는 `상식(常識)`이다. 사회의 구성원이 공유하는,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이나 지식, 판단력이 상식일진데, 우리 사회에서는 소위 노블레스들이 오히려 상식을 손쉽게 넘어서버리곤 한다.
지난달 25일 민주통합당 윤관석 의원을 비롯한 13명의 의원은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개정법률안에 따르면 증인 불출석의 처벌을 피하려면 사유서를 제출해 상임위원회 교섭단체 간사위원의 동의를 얻어야 하고, 입원치료가 필요한 경우, 증인채택 이전에 해외 출장이 확정된 경우여야 한다. 특히 합당한 이유 없이 불출석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되어 있는 현재 조항을 '3년 이하의 징역'으로 못박아 처벌강도를 높였다.
국회의원들의 시도는 가상하다. 그러나 지금껏 국회가 관련법에 따라 증인을 고발한 비율은 채 20%도 안되고, 처벌한 경우도 거의 없다. 법을 만들었으면 그 법을 적용해 시비를 가리고 벌할 것은 벌해야 한다는 상식이 통하지를 않는다.
입법기관인 국회가 자신들도 지킬 수 없는, 지키지도 않을 법을 만든다. 국회가 처벌할 수 있는 법이 있는데도 법이 약하다는 핑계로 법만 자꾸 뜯어고친다는 쓴소리를 듣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양심`이다. 법과 상식이 홀대 받는 마당에 양심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골목상권이 붕괴되고 소시민 자영업자들이 생활고에 허덕인다는 뉴스가 넘쳐나도, 시장경제, 자유경쟁 체제에서 기업의 이윤추구를 막지 말아달라는 재벌의 논리를 앞세우는 거대 유통회사들에게 양심과 기업윤리는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다.
한국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회지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와 책임이 아니라, "재력과 권력을 손에 쥔 기득권층이면서도 되도록 보통사람들의 준법의식과 상식 및 양심의 잣대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정도로 재정의해야 할 것 같다.
이대로라면, 그들에게 더 이상의 국민들의 축복, 존경, 추종은 없을 것이다. `노 블레스(no bless)`다. 그러니, 부디 상식과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그저 법이라도 지켜달라고 `부탁’ (oh, please)`할 밖에.
김종화 생활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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