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정영두는 사회적인 눈을 가진 무용가다. 마당극과 노동극에서 배우로 활동하다 무용가로 변신한 독특한 이력 때문일까. 그의 작품에는 감각적인 몸의 향연, 그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
안무가 정영두가 이끄는 두 댄스 씨어터의 신작 <먼저 생각하는 자-프로메테우스의 불>은 기술과 인간에 대해 사유하는 작품이다. 8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을 통해 안무가와 무용수들은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이라는 문명의 이기를 가져다 준 이후 인간은 과연 얼마만큼 행복해졌는가를 찬찬히돌아본다.
이 작품의 출발점은 지난 2011년 3월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다. 당시 정영두는 피해 현장을 직접 방문할 기회를 얻었는데, 피폭에 노출돼 있는 주민들이 그대로 일상생활을 이어가는 모습에 충격을 받고 본 공연을 구상했다.
올해 3월 정영두와 두 댄스 씨어터는 비전공자인 일반인 무용수들과 함께 <먼저 생각하는 자-프로메테우스의 불>의 시험판 공연을 선보인 바 있다. 23명의 일반인들과 2개월간의 연습을 통해 만든 시험판 공연은 '공동체성 회복'이라는 커뮤니티 댄스로서의 기능을 하는 동시에 11월 본 공연의 토대를 구축하는 역할을 했다.
이번에는 일반인 대신 전문 무용수 7인을 선발해 작업 중이다. 8일 LG아트센터 연습실에서 공개된 연습 장면을 보니 지난 3월 공연과는 크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특히 공개된 장면 중 거대한 책이 등장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일곱명의 무용수들은 대형 사이즈의 책 7권을 떨어뜨리도 하고, 펼치고 읽기도 하면서 책으로 대변되는 문명의 장단점에 대해 사색하는 듯한 몸짓을 펼친다. 공연을 일주일 남짓 앞두고 함께 뛰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안무가 정영두와 공연팀을 만났다.
- 왜 하필 신화 속 인물인 프로메테우스를 작품의 모티프로 삼게 됐나?
▲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나도 알고는 있었지만 이번 작품을 하면서 더 알게 된 측면이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먼저 생각하는 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점, '끝을 맺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에피메테우스라는 동생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런 것들이 흥미로웠다. 연극에서 배우들의 경우 확신이나 근거가 없으면 머뭇거릴 때가 많다. 그런데 춤에서는 먼저 생각하는 것이나 확신이 없어도 그냥 갈 때가 있다. 행동한 후에 생각이 얻어지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전에는 나도 정신이 몸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춤추는 사람에게 흔히 많이 하는 얘기가 '생각 좀 해라, 무식하다'라는 것인데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무용수들은 리서치도 많이 안 하는 것 같고(웃음). 그런데 무용수들은 늘 오전 8시부터 몸을 풀며 하루를 시작한다. 무용수들을 보면서 '생각하는 가치가 실천하고 움직이는 가치보다 늘 우선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 '생각하다(think)'라는 말의 어원도 '드러내다, 나타내다'이더라. 우리가 생각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결국 실천이라는 행위를 통해서만 증명되는 것이다.
그리고 프로메테우스에 대해 조금 다른 생각도 하게 됐다. 인간 입장에서 보면 프로메테우스가 우리에게 좋은 것을 베풀어준 것이지만, 신들의 왕 제우스 관점에서 보면 간사한 지식을 전해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프로메테우스가 우리에게 준 것이 육체를 억압하는 지혜, 간교한 지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먼저 생각한다'는 것을 그런 의미에서 다시 생각해보면서 이번 작품을 만들었다.
-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는?
▲ 두 가지다. 하나는 일반사회에 관한 생각인데, 작년에 <히로시마 합천>이라는 작품을 하면서 '원자력, 핵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우연히 후쿠시마에 답사를 갔었다. 3월에 원전 사고가 났었고 답사를 간 것은 8월1일이었다. 주변 20킬로미터 반경 안에는 못 들어갔지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7월 1일 일본 정부로부터 이주 명령을 받은 지역이 있었는데 거기 빈집에 원숭이들이 나와서 정원에서 뛰놀고 있고 떠나지 못하는 노인들은 그대로 남아 살고 있었다. 누군가는 여기서 대대로 살면서 미래를 꿈꿨을텐데 그곳을 떠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쩔 수 없어 머물고 있었다. 그러더 중 국토 면적당 원자력 발전소가 가장 많은 나라가 우리나라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다. 우리가 아주 둔감한 상태에서 살고 있더라. 괴물같이 변해버린 기술과 공존하고 있다. 올 대선에 누군가가 당선돼 인류 역사에 유래가 없는 평화를 이룬다하더라도 저기 어딘가에서 원자력 발전소 터지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이건 이념을 넘어선 차원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런데 한편으로 한전을 통해 내가 원자력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를 과연 얼마나 쓰고 있나 알아보기도 했다. 예술가라는 오만함 때문에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면서도 그냥 비판하는 것은 아닌지, 문명의 이기나 기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됐다.
또 한가지 계기는 무용가 입장에서 기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내가 언제까지 춤을 출 수 있을 지 모르는데 만약에 내 몸이 노쇠해 인공관절로 대체된다면 내 춤과 내 몸의 가치가 어떻게 달라질까, 몸이 필요 없는 상태가 된다면 그때 과연 내가 무용가로서의 정체성이 있는 것인가 생각해 보게됐다. 인간의 몸이 점점 더 기계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 때에도 내가 추구하는 것을 계속 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 세 가지 장면을 시연했는데 장면에 대해 설명해달라.
▲ 먼저 보여드린 것은 '육진(六塵)'이라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는 기술 혹은 도구가 문제인가를 묻고 있다. 가령 사람들은 과일을 깎아 먹으면 배가 부르기도 하지만 칼에 손을 베기도 한다. 칼이 문제라는 것은 아니고, 아마도 인간의 욕망이 문제일 것이다. 6가지의 인간의 욕망과 관련된 부분을 이 장면에 담았다. 오욕과 더불어 의식, 즉 감각을 머리속으로 느끼는 단계까지를 '육진'이라고 하더라. 육진을 수화 같은 형태로 담았다.
두번째는 복제에 관한 장면이다. 이미 스포츠계에서는 선수를 뽑기 위해 유전자 검사를 하기도 한다고 하더라. 보험에서도 부모의 병력 같은 것 따지지 않나. 무용의 경우에도 큰 발레단 같은 경우 유전적 요소를 따져서 뽑기도 한다. 이런 측면이 극한까지 가면 춤도 많이 달라질 것 같다. 본인이 살기 위해 DNA를 복제하는 세상이 온다면 춤은 또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에 대해 묻는 장면이다.
세번째는 책에 대한 장면이다. 이 작품의 주제와 가장 잘 맞는 장면이다. 디자이너에게 책을 크게 만들어달라고 했다. 지식이 이만큼 발전했는데 우리는 행복해졌는가. 스마트폰 쓰는 지금이 주먹도끼를 쓰던 때보다 더 우월한가를 묻고 있다. 우리의 지식이 혹시 누군가를 억압하는 지식, 스스로 우월감을 느끼게 하는 지식이 아닌가 생각해봤다. 지식으로 인해 얻는 이득도 있지만 손해도 있다는, 딜레마적인 상황을 담은 장면이다. 중간에 영상도 들어간다.
- 일반인들과 공연을 먼저 진행했었는데, 이번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 미리 무대화 시켜봤다는 게 가장 의미가 크다. 공연에서 어떤 지점이 우려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스태프들은 예전이나 이번이나 전부 같다. 3월에 했던 공연 중 한두 장면만 가져오고 나머지 소재는 다 바뀌었다. 3월의 경우, 예를 들면 손에 대한 소재도 있었다. 자본가들이 손이 가진 기술을 다 없애고 뭉개뜨린다는 장면이었다. 또 기술이나 정보가 발달한 민족이 그렇지 않은 민족을 착취하는 장면도 있었다. 이밖에 <화성 연대기> 같은 소설에서 모티프를 따오기도 했고. 그런데 이번에는 넣지 않았다.
- 무대 디자인에 대해 소개하자면?
▲ 그동안의 작품에서는 기술적인 요소를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춤은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더 기술과 만나보자는 생각을 하고 시도도 했다. 육진 장면 같은 경우 무용수들에게 마이크를 채울 계획이다. 숨소리, 호흡을 실시간 사운드로 담아낼 생각인데 그 자체가 욕망을 잘 표현해내주지 않을까. 책에 관한 장면에서는 영상이 들어가기도 한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무용공연이라는 생각이 커서 무용을 많이 보여주려 했다.
- 머리에 손을 올리고 뛰어다니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포스터에도 나오는 이 손짓의 의미는 무엇인가?
▲ 안무를 짜다가 답답할 때 말의 어원을 찾는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먼지 같은 6가지의 것', 즉 육진이라고 표현하더라. '티끌 진'을 쓰는데 이 글자를 찾아 보니까 사슴들이 뛰어다니는 형상이었다. 인간의 욕망을 한자에서는 이렇게 표현했구나 싶었다. 결국 욕망이 없으면 생명이 존재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그 딜레마를 표현하기 위해 나온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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