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기성기자] 10대 그룹이 올해 투자계획을 놓고 말 그대로 '끙끙' 앓고 있다.
이달 출범할 박근혜 정부와의 관계 설정을 고려하면 힘을 실어줘야 하지만, 대내외 경제 불확실성을 생각하면 무턱대고 대규모의 투자계획을 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민주화 광풍 속에 재계에 대한 압박 수위가 그 어느 때보다 커지면서 10대 그룹들의 속앓이는 거의 곪아 터질 수준에 이르렀다는 게 관계자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투자할 곳은 없는데 필요 이상의 투자금을 내놔야 하는 그룹들의 속은 이미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다는 얘기다.
5일 현재 10대 그룹 가운데 올해 투자계획을 발표한 곳은 LG와 포스코 뿐이다. 대한항공도 투자계획을 내놨지만 한진그룹 전체로는 여전히 유동적이다. 1월을 넘어 2월로 접어들었지만 나머지 7개 그룹의 투자규모는 여전히 미확정 상태로 보류돼 있다. 지난해 1월 중순 이들 10대 그룹의 투자계획 발표가 마무리된 것과는 확연한 차이다.
먼저 LG그룹은 지난달 6일 시설부문 14조원, 연구개발 6조원 등 총 20조원 규모의 투자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전년도 투자액 16조8000억원에 비해 19.1% 늘어난 규모로 사상 최대다. LG의 과감하고 공격적인 투자는 다른 그룹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했다. 일부는 선제적 대응으로 해석, 배경에 눈을 흘기기도 했다.
이어 포스코가 지난달 29일 연결기준으로 7조~8조원, 단독기준으로 4조원 규모의 투자계획을 내놨다. 지난해 연결기준 7조2000억원, 단독기준 3조6000억원과 엇비슷한 수준으로, 긴축 경영 전환을 예상했던 재계 전망을 넘어섰다. 대한항공 또한 지난해보다 16% 늘어난 1조9150억원의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나머지 그룹들의 침묵은 길어지고 있다. 특히 재계 1위이자 다른 그룹들의 바로미터 역할을 할 삼성의 고민은 너무도 깊어졌다. 삼성은 최근 3년간 해마다 투자를 크게 늘리며 공격적 행보를 보였다. 지난해에는 47조8000억원의 사상 최대 투자계획을 내놓기도 했다. 당연히 경제위기 극복 과제를 안고 등장하는 새 정부로서는 기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삼성도 이를 인지하고 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와의 직간접적 채널을 통해 “할 수 있는 여건에서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한 이유다. 하지만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설비 투자를 이미 크게 집행한 상황이어서 마땅한 투자처를 찾기 쉽지 않다는 게 관계자들의 공통된 속내다. 한 고위 관계자는 “인수합병(M&A) 외에는 돈 풀 곳이 마땅치 않다”고 하소연했다.
각 사별로 추가 투자계획 마련을 지시했지만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는 지난달 25일 올해 전망과 관련해 “경영 불확실성이 높은 환경을 감안해 올해 시설투자는 글로벌 경기, IT 수요 회복과 수급 전망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상황에 맞게 탄력적으로 운영할 예정”이라고 했다. ‘탄력적’이란 말이 눈에 띈다.
삼성전자는 또 “미래 중장기적 경쟁력과 핵심기술 확보를 위한 연구개발(R&D) 투자는 지속적으로 과감하게 추진할 예정”이라고 했지만, 연구개발 부문의 경우 지난해 매월 1조원, 연간 12조원 규모의 투자를 집행한 것을 감안할 때 아무리 늘려 잡아도 시설부문 규모에는 턱 없이 못 미친다는 지적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시설부문 22조9700억원, 연구개발 12조원 등 34조9700억원의 투자를 집행한 것으로 추산된다.
결국 신수종 사업에 대한 전략적 접근 없이는 대규모 투자는 힘들어 보인다는 게 재계의 공통된 기류다. 이는 사실상 새 정부 기대치인 투자 총액 50조원 수준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으로 해석되면서, 삼성의 발표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 것에 대한 근거로 제시되기까지 했다. 삼성 관계자는 이날 “현재로서는 발표 계획이 전혀 잡혀있지 않다”고 말했다.
다른 그룹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현대차는 올해 자동차 부문에서만 10조원의 투자를 계획하는 등 총 15조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세운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전년 대비 각각 5000억원, 9000억원 늘어난 규모다. 문제는 이 역시 유동적이란 데 있다. 현대차는 당초 ‘질적 성장’으로 경영 방침을 전환하면서 외형 성장을 이끌었던 투자를 예년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목표를 뒀다.
그러나 앞서 투자계획을 내놓은 그룹들이 하나같이 규모를 늘려 잡으면서 새 정부에 대한 눈치 보기 또한 덩달아 커졌다는 게 몇몇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한 관계자는 “원화 절상에 엔저까지 환율전쟁이 극심해진 데다 소비심리마저 위축돼 골치”라며 “여러 변수가 있어 시장조사를 철저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서로들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며 "상당히 조심스럽다"고 털어놨다.
SK는 일단 17조원 안팎의 투자계획을 잠정 확정했지만 최근 최태원 회장이 법정 구속(4년 실형 선고)되면서 불투명성이 커졌다. ‘선장을 잃었는데 더 이상 (정부를 의식한) 무리수가 필요한지’에 대한 회의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한 관계자는 “매출 등 장기 경영계획 수립은 지금 상황에서 의미가 없다”면서 “다만 투자와 채용계획은 조만간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국내경제 상황이 어려울 때 조금이라도 (투자를) 늘린다는 것이 기본적 방향”이라며 “이 기조는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전했다. “16조원을 집행했던 전년 실적 대비 (규모가) 좀 더 클 것”이라고 말한 점에 미뤄, 17조원 규모는 그대로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SK는 지난해 19조1000억원에 달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투자계획을 내놨지만 집행은 이에 못 미치는 16조원 수준에 그쳤다.
이 밖에 한화는 올해 특별한 투자계획 발표 없이 ‘시나리오 경영’에 돌입할 것으로 전해졌다. 경영환경을 둘러싼 대내외적 변수가 너무 많은 데다 불확실성도 커 시나리오별 대응에 나서는 것이 현 시점으로서는 유일한 맞춤형 전략이란 판단이다.
한화 관계자는 “예측에 의존해 무리하게 계획을 내놓기보다 시나리오 경영을 하는 게 현재로서는 대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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