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괴물의 공세에 양사 모두 무방비로 놓인 데다 야기된 시장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결국 '돈'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이다. 시장을 의식해야만 하는 제조사의 약점을 특허괴물이 전략적으로 이용, 파고 들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12일 SK하이닉스는 미국의 특허괴물로 불리는 램버스와 포괄적 특허 라이선스 계약 체결을 발표했다. 13년간 끌어온 지루한 싸움의 종지부를 찍게 된 셈이다. 이로써 SK하이닉스는 향후 5년간 총 2억4000만달러에 육박하는 사용료를 램버스에 지불해야만 한다.
지난 2010년 램버스에게 특허 라이선스 계약을 명목으로 총 7억달러의 사용료와 2억달러의 투자금을 건넨 삼성전자보다는 월등히 유리한 조건에 합의에 이르렀지만 이 또한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다. 특히 삼성전자와의 매출 격차를 고려할 때 SK하이닉스로서는 크나큰 부담일 수밖에 없다.
특히 삼성전자의 경우 특허사용료 명목으로 산정된 누적 매출액을 대상으로 분석하면 메모리사업부 매출액 대비 라이선스 비용이 0.9% 수준으로, SK하이닉스보다 4배 가량 높은 수준이다. 반면 SK하이닉스는 미국 법정에서의 우위 등을 기반으로 비교적 유리한 조건에 계약을 체결했다.
관련 업계에서는 램버스가 최근 ‘특허괴물’의 오명을 벗고 기업들과 우호적 협력관계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했다는 점, 그리고 미국에서 진행 중인 소송이 불리하게 전개됐다는 점 등을 이번에 SK하이닉스가 비교적 낮은 금액의 특허사용료를 이끌어낸 원동력으로 분석했다.
이에 대해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이번 경우는 지난번 삼성전자와 달리 우리가 끈질기게 싸워서 이긴 것으로 되레 굴복이라면 램버스에게 적용되는 것"이라며 "협상을 아주 잘 이끌어낸 것으로 봐야 한다"고 반론했다. 이번 계약 체결을 통해 그간 골칫거리였던 특허괴물과의 소송을 전부 털어냄으로써 오히려 홀가분해졌다는 내부 평도 잇달았다.
그러나 시장의 해석은 전혀 달랐다. 해외 투자자들은 막대한 특허사용료를 거둬들일 램버스의 입지 강화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실제 SK하이닉스와의 라이선스 계약 체결 소식이 전해진 직후 미국 증시 시간외 거래에서 램버스의 주가는 8% 이상 급등하는 등 이례적인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기업간 특허를 전문으로 하는 구태언 테크앤로 변호사는 "크로스 라이선스에 합의한다는 것은 해당기업이 사실상 특허침해를 인정하고 사용료를 지불하겠다는 얘기"라며 “기업이 미래에도 특허괴물이 보유한 특허권을 피해갈 수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램버스와 같은 글로벌 특허관리전문회사(NPE)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국내 주요 기업들 사이에서도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특허전쟁이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는 애플과 삼성전자 간 특허소송이었다.
최근 특허정보진흥센터에 따르면 지난 2009년 3199건이었던 특허관리전문회사들의 표준특허 수는 2012년 5050건으로 3년만에 무려 1851건이나 증가했다. 특히 전체 표준특허 중에서 이들 특허괴물이 차지하는 비율도 2012년 12.2%로까지 확대됐다.
NPE 가운데 미국의 인터디지털은 전체 표준특허의 90%가 넘는 4561건을 보유, 가장 많은 표준특허를 확보한 기업으로 나타났다. 이외에도 애플의 자회사인 록스타비드코, 인텔렉추얼 벤처스 등이 호시탐탐 한국 기업을 ‘사냥감’으로 노리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나라 주력산업 중 하나인 휴대폰 사업을 이끌고 있는 삼성전자,
LG전자(066570), 팬택 등 제조3사의 경우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인터디지털, 인털렉추얼 벤처스(IV) 두 곳에 지급한 로열티만 1조3000억원을 넘는 것으로 전해졌다.
◇SK하이닉스 청주 공장(사진제공=SK하이닉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