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기성기자] 새누리당이 29일 당내 일명 ‘손가위’로 불리는 ‘손톱 밑 가시제거 특위’를 출범시켰다. 중기 대통령을 표방한 대통령 뜻에 따라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자영업자 등이 애로를 호소하는 각종 현안들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라고 자평했다.
민주당과의 NLL 전선에서 일정부분 성과를 거둔 만큼 이제 민생으로 돌아서겠다는 출구전략으로도 읽혔다. 국정원의 대선 불법 개입이라는 검은 그림자를 덮는 데도 성공했다. 정권 정통성에 더 이상 위해가 가지 않는다고 판단한 데다 10월 재보선도 신경 써야 했다.
새누리당 전신인 한나라당 출신인 강용석 전 의원 말마따나 완벽한 ‘물갈이’가 따로 없었다. 역시 현실정치에서 최고의 전략은 ‘떼쓰기’와 ‘우기기’, ‘덮어씌우기’,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쪽수’였다.
민주당은 이 와중에도 계파싸움 등 당내 권력투쟁에 몰두하다 새누리당 전략에 휘말렸다. ‘네탓 싸움’을 벌이는 집안에 대한 국민적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다. 다가올 재보선과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되레 심판의 대상으로 전락할 처지로 내몰렸다는 평가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새누리당이 새로 발족한 특위에 부여한 특명은 ‘가시 제거’였다. 문제는 ‘가시’가 민생의 어려움이 아닌 경제민주화 법안들로 바뀌었다는 데 있다. 최경환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경제민주화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현장에서는 입법 의도와는 다른 현상들이 나타난다는 얘기가 있다”며 “현장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겠다”고 했다.
김기현 정책위의장도 “(경제 문제에 대한) 현장 목소리와 정부 처방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있는 점을 확인했다”며 "기업 활동에 걸림돌이 되는 규제완화를 위해 힘쓰겠다"고 말했다. 어느새 ‘가시’는 기업규제로 규정됐다. 향후 철거하고 무너뜨릴 대상은 규제가 됐으며, 이것이 특위의 목적이 됐다.
역행도 이만한 역행이 없다. 뿐만 아니다. 새누리당은 앞서 국회에서 통과된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들이 현실에 맞지 않게 과도한 측면이 있다며 일명 ‘경제민주화 애프터서비스(AS) 법안’을 오는 9월 정기국회에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시민사회 등 진보진영에서는 즉각 “새누리표 AS센터를 차려라”고 비난했다.
이현재 의원은 “상반기 통과된 경제민주화 법안 중 입법 당시 야당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인 법안들이 있다”며 1억원 미만의 공공기관 납품은 소기업만 가능하도록 규정한 '중소기업제품 구매 촉진 및 판로 지원에 관한 법률' 등을 예로 들었다. 또 투자활성화를 위해 필요하다는 이유로 6월 임시국회에서 야당 반대로 처리가 무산됐던 '외국인투자촉진법' 개정안도 정기국회에서 재추진키로 했다.
청와대와 정부, 여당의 이른바 무게 있는 인사들의 발언은 더욱 구체적이고 노골적이다. 차기 당권주자로 유력한 김무성 의원은 “대기업의 투자 마인드 고취에 초점이 모아져야 하는데 오히려 경제민주화에 힘쓰고 있다”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고, 정몽준 의원도 “선진국들은 경제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위기감에서 기업규제를 완화하는데, 우리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경제 사령탑인 현오석 경제부총리는 지난 27일 전경련 제주포럼에 참석해 “기업들이 일감 몰아주기 과세 방안에 부담을 느끼는 만큼 완화 방안을 세제 개편안에 추가해 9월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깜짝 발언을 했다. 그러면서 “하반기에는 기업활동 지원을 통한 경제 활성화에 정책 초점을 두겠다”고 말했다.
앞서 국세청은 지난 23일 하반기 기업 세무조사 대상을 기존 계획보다 축소하겠다고 발표했다.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데 규제를 풀지 못할지언정 강화하거나 세무조사로 윽박질러서는 안된다는 청와대 기조가 반영된 결과였다. 재벌을 중심으로 재계가 주장해온 경제위기론이 시대적 과제인 경제민주화를 누른 것이다.
정부여당의 변화된 움직임은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종료’ 선언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앞서 지난 10일 언론사 논설실장들과의 오찬간담회에서 “경제민주화는 거의 끝에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업 투자를 종용할 칼마저 손에서 내려놓은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의 진척은 없을 것으로 참석자들은 받아들였다.
종료 선언에까지 이르자 도대체 무엇을 했느냐는 지적이 따갑다. 경제민주화의 전제였던 재벌개혁, 특히 지배구조 개선에 대해서는 한걸음도 못 나아갔다는 비판이다. 1%도 되지 않는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총수 전횡의 배경에는 무엇보다 순환출자 구조가 있다는 게 경제학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이로 인해 일감 몰아주기 등을 통한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와 편법 승계 등이 자행됐다.
재벌 총수의 경제범죄 엄단을 현실화하는 법안들도 제동이 걸렸다. 재벌 총수의 중대범죄에 대해선 집행유예를 불가능하게 하고(특정경제가중처벌법 개정안), 형이 확정된 뒤에는 대통령이 사면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사면법 개정안)이 법제사법위원회에 나란히 계류 중이다. 법을 중시하고, 신뢰를 자신의 정치적 최대자산으로 생각하는 박 대통령은 이에 대해 일언반구 없다.
삼성을 필두로 재벌그룹들의 사상최대 투자를 이끌어낸 것에 그저 만족해하는 눈치다. 오죽하면 “투자하는 분들은 업고 다녀야 한다”고까지 했을까.
문제는 이들 재벌그룹들의 투자가 중국과 동남아 등 해외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이 이를 간과하면서 투자로 인한 관련산업의 발전과 고용창출, 소비진작 등 이른바 낙수효과는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박 대통령이 재벌들에게 투자와 고용을 구걸하는 순간 경제민주화는 물 건너갔다”고 말했다. 또 “문제는 투자 규모가 아니라 투자 효율성이 낮은 데 있다”며 “투자 효율성을 높이려면 재벌 위주 경제체제를 개혁해야 하는데, 반대로 재벌 압력에 굴복하면서 박근혜 정부는 실패할 수밖에 없게 됐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특히 “경제민주화와 경제성장을 상충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한 경제민주화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며 이분법적 인식의 한계를 지적했다. 경제개혁연대를 이끌고 있는 김상조 한성대 교수도 “경제민주화는 경제구조와 체질을 개선하는 것으로 중장기적인 (성장)정책”이라고 말했다.
보다 못한 여당 의원들도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이혜훈 최고위원은 “박 대통령의 핵심정책인 창조경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경제민주화는 반드시 이뤄내야 할 선결과제”라고 말했고, 정무위 간사인 박민식 의원은 “기업 지배구조와 관한 법이 처리돼야 경제민주화 법안이 100% 근접할 정도로 완성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 소장파의 목소리는 재벌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지도부에 막혀 전달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경제민주화는 끝났다"는 자조에 모두들 수긍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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