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수현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정권 전반으로 번진 대선 개입 의혹에 대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지만 기존에 내놨던 입장을 되풀이하는 수준에 그쳐 우려를 낳고 있다.
박 대통령은 31일 근 한 달여 만에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개인적으로 의혹을 살 일을 하지 않았다"며 "사법부의 판단과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고 밝혔다.
◇자신의 '결백' 강조하며 '사법부 판단' 보자는 朴 대통령
박 대통령의 이날 언급은 국가기관의 전방위 대선 개입과 자신은 무관함을 강조함과 동시에 대선 개입 '의혹'이 '사실'로 확인될 때까지 정쟁을 자제할 것을 주문한 것으로 풀이된다.
국가정보원, 경찰, 국군 사이버사령부, 국가보훈처, 안전행정부, 외교부, 고용노동부 등이 여론을 조작하는 방식으로 대선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줄을 이으면서 정국이 극한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국정원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았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박 대통령의 일방 대처법이 격랑에 휩싸인 국면을 정상화시킬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번 주에 막을 내리는 국정감사 이후에도 여야는 이 문제로 대치를 계속할 전망이다. 자칫 박 대통령이 서유럽 순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11월 9일이 지나도 정국 정상화는 요원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작금의 사태를 바라보는 박 대통령의 인식이 변하지 않는 이상 상황은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점점 더 꼬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결백'은 말 할 필요도 없어..결과 '유죄'로 나오면 정권 정통성 시비
일단 박 대통령이 거듭 "개인적으로 의혹을 살 일을 하지 않았다"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박 대통령이 국정원 등에 자진해서 도움을 요청했다면 그건 곧 부정선거가 된다. 그리고 박 대통령이 그렇게 했다는 의혹은 제기된 바도 없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국정원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았다"에서 "개인적으로 의혹을 살 일을 하지 않았다"까지 대선 개입과 본인은 무관함을 강조하는데 공을 들이고 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비아냥이 나오는 이유다.
또 "진행되고 있는 사법부의 판단과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는 대목은 본질을 비켜간 박 대통령의 인식이 향후 일을 더 꼬이게 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게 만든다.
만약 사법부에서 국정원의 대선 개입에 유죄 판결을 내린다면 지난 대선의 절차적 정당성은 통째로 흔들리게 된다. 이는 분명히 박근혜 정권의 정통성 시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비롯한 관련자 몇몇에게만 "책임을 묻는" '꼬리 자르기' 정도로는 '불공정'이 확인된 지난 대선의 결과를 인정받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대선 개입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 정권의 정통성마저 흔들리는 상황까지 가서야 야권이 요구하는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내놓는 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는 셈이다.
아울러 박 대통령이 취하겠다고 약속한 "불편부당하고 필요한 조치"가 무엇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재발 방지책도 마련할 것"이라면서 국정원에 '셀프 개혁'을 주문한 점은 여전히 모순이다.
◇'무죄' 나와도 문제..朴 정부 선거들 공정성 어떻게 담보할까
그리고 사법부가 무죄 판결을 내리더라도 문제의 소지는 발생한다.
국정원 등이 온라인 공간에서 문재인 민주당 의원을 비방하며 여론을 조작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러한 불법을 저지른 관련자들을 처벌하지 못하게 될 경우, 향후 박근혜 정부에서 치러질 선거들의 공정성을 담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유권자의 투표권이 소중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면 박 대통령은 법원이 '무죄' 판결을 내렸을 때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공정한 선거를 담보할 것인지 의문스럽다.
사법부의 판단을 지켜보자는 박 대통령의 인식은 그래서 위태롭다. 법원이 국정원 등의 대선 개입은 사실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면 그저 수수방관할 생각인지 궁금해진다.
문 의원이 "이제 박 대통령이 답할 차례"라며 공을 건넨 의미는 "결백"과 "사법부 판단을 지켜보자"는 말을 기대한 게 아니라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이었음을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만 모르는 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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