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시장이자 두 번째 교역상대국인 유럽연합(EU)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이 잠정 합의 단계에 이르자 재계도 업종별로 영향과 대응 방안을 점검하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산업계는 현재 EU에 대해 230억달러(2008년 기준)가 넘는 무역수지 흑자를 내는 '수출우위' 상황에서, 평균 4% 수준인 EU의 관세까지 없어지고 무역구제조치.인증제도.환경규제 등 비관세 장벽도 낮아지면 전체적으로 불리할 것이 없다는 판단이다. 특히 자동차, 가전, 섬유 등의 경우 뚜렷한 수출 확대 효과가 기대된다.
그러나 소재를 포함한 화학과 기계류 등 EU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부문에서는 '완전 개방'에 철저히 대비하지 않으면 무역 역조가 더욱 심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 車 산업 도약 전기 맞아
한.EU FTA가 타결되면 국내 자동차 산업은 EU 권역으로 자동차 수출이 크게 늘어나는 등 글로벌 시장에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된다. 한국자동차공업협회에 따르면 EU는 지난해 기준으로 자동차 수요가 1473만8000대로 미국(1319만대)을 앞선 세계 최대의 시장이다.
작년에 한국의 대(對) EU 자동차 수출 규모는 40만8934대에 금액으로는 50억9859만달러를 기록했고 EU권으로 부터 수입은 4만1880대, 19억8781만달러에 달했다.
한국 입장에서 보면 대수로 수출이 수입의 9배에 달하지만 금액으로는 2배에 못미치는 점을 보면 수출은 소형차 위주인 반면 수입은 주로 초고가 프리미엄 브랜드 위주로 이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협정의 골자는 관세 철폐다. 양측은 배기량 1.5ℓ를 초과하는 가솔린 및 디젤 모델은 3년내에, 1.5ℓ이하 차량은 5년내에 관세를 없애기로 했다.
관세가 폐지되면 한국산 차들이 가격 경쟁력이 높아져 유럽시장 공략에 가속도가 붙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특히 기존 한국의 수입관세는 8%이지만 EU는 이 보다 2% 포인트 높은 10%를 적용하고 있어 관세율만 놓고 보더라도 이번 협정은 한국에 불리하지는 않다는게 전반적인 관측이다.
또 5년내에 1.5ℓ이하 차량에 대한 관세가 없어지면 중소형 부문에서 글로벌 품질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는 한국산 자동차가 가격 경쟁력까지 갖추게 돼 EU시장 공략에 한층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다.
다만 배기량 1.5ℓ를 초과하는 모델이 먼저 관세가 없어지기 때문에 유럽의 프리미엄 중대형 브랜드가 한국 시장에서 영역을 넓혀 국산 차들의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의 경우, 현재 국내 판매 가격이 1억2990만~2억5990만원에 이르지만, 관세가 8% 낮아지면 1억1950만~2억3910만원까지 가격이 떨어진다. 한 대 가격이 많게는 2천만원이상 싸지는 셈이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관세가 철폐되면 EU지역 수출이 현재보다 최대 20%이상 늘어나는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한다"며 "국내 시장에서 수입차 점유율이 10% 이상을 차지하더라도 득이 실보다는 훨씬 크다"고 전망했다. 김 교수는 또 "미국과의 FTA 협상에도 기준점으로 작용해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 전자.섬유 등 '기대'
우선 주요 업종 중에서는 자동차와 더불어 전자업계의 수혜가 예상된다. 전자제품(반도체 제외)의 경우 우리나라가 지난해 EU와의 교역에서 업종 가운데 가장 많은 163억달러의 흑자를 거둘만큼 수출이 월등히 많기 때문이다.
현재 EU는 ▲ TV(14%) ▲ TV용 브라운관(14%) ▲ VCR(8~14%) ▲ 냉장고(1.9~2.5%) ▲ 에어컨(2.2~2.7%) ▲ 전자레인지(5.0%) 등 우리나라 주요 가전에 낮게는 약 2%에서 높게는 14%까지 관세를 매기고 있다. 평균 세율이 높지 않고, 국내 전자업계의 동유럽 현지 생산 증가로 가전 직수출이 줄어드는 추세지만, 관세 철폐로 경쟁력이 더욱 커지는 것은 분명하다.
휴대전화 등 통신기기, 반도체, 측정장비, 컴퓨터 관련 상당 수 품목은 이미 지난 1997년부터 세계무역기구(WTO) 정보기술협정(ITA)에 따라 '무(無)관세'로 거래되고 있어 FTA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다만 그동안 EU가 TV 기능을 갖춘 LCD 모니터, 동영상 송수신이 가능한 3세대 휴대전화 등 일부 컨버젼스(융합) 제품을 '가전'으로 간주, 부과했던 10% 안팎의 관세를 피할 수 있게 됐다.
반대로 EU가 비교 우위에 있는 반도체 생산장비, 정밀계측기기, 전자의료기기 등은 현행 8% 정도인 관세가 없어지면 수입이 늘어날 전망이다.
섬유도 전반적으로 '득'이 '실'보다 많을 것으로 기대된다. 대만.중국과의 치열한 경쟁 등으로 대(對) EU 섬유제품 무역수지가 2007년 7억8000만달러에서 지난해 1700만달러로 급감한 가운데,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품목인 화학섬유원사 등에 대한 4~12%의 관세가 사라지면 경쟁력 확보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EU 의류제품에 부과하는 8~13%의 관세도 함께 없어져 명품 브랜드를 포함한 유럽산 고가 의류 수입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우려도 있다.
철강, 조선의 경우 한.EU FTA로 기대할 수 있는 직접적 관세 혜택은 거의 없다. 철강제품 상당 수 품목은 지난 2004년 우루과이라운드(UR) 관세협상에 따라 이미 '영(0)세율'을 적용받고 있고, 선박 역시 지금도 서로 관세를 매기지 않기 때문이다.
◇ 화학.기계 등 '긴장'
반면 지난해 EU와의 무역에서 25억달러나 적자를 본 화학업종(정밀화학+석유화학)의 경우 관세 철폐를 무조건 반길 처지가 아니다.
EU는 전 세계 화학산업 매출의 30%(2005년 기준)를 차지하고, 세계 30대 화학기업 가운데 바스프(BASF).쉘(Shell).바이에르(Bayer).토탈(Total) 등 무려 13개를 보유하고 있는 막강한 '화학 제국'이다.
특히 정밀화학 분야의 경우 국내기업들의 규모가 영세하고 경쟁력도 취약할 뿐 아니라 현행 EU 관세율이 평균 4.5%로 우리나라의 6.87%보다 낮아 관세를 동시에 없애면 우리측 타격이 더 클 수 밖에 없다.
2006년 현재 의약(55%), 화장품.향료(35%), 농약(30.8%) 등 수입 정밀화학 시장에서 평균 약 30%를 차지하고 있는 EU 제품의 점유율은 관세 철폐 후 더욱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가 EU에 주로 수출하는 염.안료, 도료.잉크 등 저부가가치 제품의 경우 원천적으로 기술 경쟁력, 마케팅 등에서 열세인만큼 큰 폭의 수출 확대는 기대하기 어려운 처지다.
합성수지.고무 등 석유화학 제품 역시 현재 품목에 따라 최고 6.5% 정도인 관세가 없어져도, EU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동 석유화학기업들과의 힘겨운 경쟁을 벌여야하는만큼 수혜가 비(非)에틸렌 계열 등 일부에 국한될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올해 들어 1~2월에만 이미 대(對)EU 무역 적자가 2억달러를 넘어선 일반기계류도 걱정이다. EU는 일반기계 전체 22개 품목 가운데 식품가공기계.종이제조기계.농기계 등 13개 품목에서 세계 시장의 절반 이상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막강한 EU 일반기계류가 현재 평균 약 7% 수준인 관세까지 면제받을 경우 현재 3분의 1 수준인 한국 수입 시장내 비중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일반기계 및 부품의 EU 수입 시장 점유율은 현재 1% 안팎에 불과한 실정이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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